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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을 벌이다 1914년 4월 다시 체포되었다. 1915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및 보 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3일 경성복 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32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지내다가 1941 년 환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⑩ 신현구 신현구(申鉉九, 1827∼ ? )는 경기 죽산군 원삼면 분촌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1908 년 음력 1월에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그해 음력 3월 대장 정주원 등 수십 명과 함께 죽산군 근삼면 백암리에 들어가 주민 백윤삼으로부터 군자금 20원을 거두었다. 그해 3~4월에는 서 대구 등 여러명과 함께 백암리에 다시 들어가 이석진 집에서 290원 어치의 군수품을 탈취하 였다. 1910년 음력 4월 16일 새벽 2시에 정대준(丁大俊) 등 의병들과 함께 죽산군 서삼면 시 암 시내의 여인숙에 묵었던 일본인 3명을 곤봉으로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 는 1910년 8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이 를 기각함에 따라 순국하였다. ⑪ 조인환 조인환(1881∼1909)은 양근의 양반 출신이다. 그는 1907년 군대 해산 직후 국권을 회복하 고자 거의하여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의진의 규모는 4백여 명에 달 했다. 69) 1907년 8월 3일 양근 읍내를 습격하고 관아와 세무서·우편물 취급소·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 방화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지평의 순사파출소, 8월 12일에는 양근 순사파출소, 8월 19일에는 지평관아를 공격하여 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공격을 받고 9월 상순 양주·파주 지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와 용문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인환은 9월 17일 다시 양근으로 들어와 남종면의 분원동 남방의 고지에서 일본군 수비 대 제47연대 제1소대와 격전을 치렀으나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 후 조인환의 행방 69) 「폭도에 관한 편책」, 경경수비(京警收秘) 제151호의 6, 융희 4년 3월 7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376쪽).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