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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울 전동에 있는 홍세영(洪世永)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이듬 해인 1908년 3월 13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⑦ 민긍호 민긍호(? ∼1908)의 본관은 여흥으로 서울 출신이다. 그는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 의 정교(正校)로 있다가 춘천분견대에 전입하고, 1901년 특무정교가 되어 원주진위대에 전입 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소단위의 여러 의 병부대로 편성하고,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 을 주었다. 특히, 강원·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 (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 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年)·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의 의병부대와 긴밀 한 연락을 취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07년 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 한 뒤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의 의병부 대 지원으로 의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8월 중순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 계획 을 세운 뒤 23일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9월 17일 약 600명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200명의 의병으로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한, 나머지 400명의 의 병은 낭천군아(狼川郡衙)를 기습 공격하여,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그는 춘천 남방의 정 족(鼎足) 부근과 횡성에서도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 원주 동북 작곡(鵲 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끝에 20여 명의 의병이 사살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탈출 도중에 전 사하였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은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컸던 부대로 강원·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