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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⑤ 정용대 정용대(鄭用大, 1882∼1910)는 경기 파주 적성 출신으로 해산 군인이다. 구한국군에서 정 교(正校)를 지낸 그는 군대 해산 이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봉기하고 스스로 창의좌군 장(倡義左軍將)이 되어 양주·풍덕·교하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인근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은찬 의진과 함께 1908년 2월 27일 양주 군 석적면에서, 그리고 3월 2일 회암면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은찬 의병장이 체포된 후에는 윤인순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6월 8일 부평군 내면을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순사와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생포되고 무기 9정을 빼앗기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는 일본군과의 효과적인 교전을 위한 군자금도 조달하였다. 1908년 4월 23일 부하 이종 근(李宗根) 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의 심진사(沈進士) 집에 가서 27동 동장과 양 릉면 28동 동장과 산빈면 24동 동장을 일제히 불러서 총의 구입 비용을 염출해 줄 것을 요청 하여 5일 후에 대금 1만 5천냥을 거두었다. 4월 24일에는 대패면에 거주하는 부위 김순좌(金 順佐) 군도 1자루, 양릉면 곡촌 한(韓) 모 군도 2자루, 교하군 민(閔) 판서에게 양총 7자루· 탄환 9백 발 그리고 마을 사람에게서도 군도 4자루를 거두어 전력을 보완하였으며 마을 사 람 조운원(趙云遠) 등과 미리 통하여 헌병·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 지법위반’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12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당하였다. 다 시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 립장을 추서하였다. ⑥ 김봉기 김봉기(金鳳基, 1866∼1908)는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그는 1907년 8월 을사조약을 체결 한 이완용(李完用) 등 7적(賊)을 성토하는 격문과 이토 히로부미 및 각국 영사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2회에 걸쳐 작성하여 윤평순(尹平順)으로 하여금 『대 한매일신보』에 게재하게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달 25일경에는 이근풍(李 根豊)·주창룡(朱昌龍)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용인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고 서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