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page

78 년 9월 김수민은 부하 병력이 300여 명에 이르자 대장이 되어 9월 중에 경기도 개성군 대흥 산 창고에 있던 관군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병력을 강화시켰다. 10월 11일 밤 경기도 장단군 북면에서 일본군과 한 차례 교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개성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열은동(悅隱洞) 일대에서 농민들을 재규합하였다. 12월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이인영 부대와 합병하고 이인영·이은찬 등과 같이 경기도 내의 장단·마전 등 각지 에서 세력을 떨쳤으며 황주·해주·서흥 등지의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의 교전을 전개 하였다. 김수민은 20명에서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1908년 4월 16일에는 구화 장(九化場) 헌병 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그 후 장단·풍덕 일대 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1908년 10월 상순에는 강화도를 기습 공략하여 그곳 재류 일인을 완 전 처단하는 전과를 세웠다. 일제는 용산의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10월 30일 강화에 상륙시켰다. 이때 전등사에 있던 약 100명의 의병들은 일군과 1주일에 걸친 격전을 벌여 치 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11월 1일 광성(廣城)으로 재상륙하여 전등사로 돌격하였 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김수민의 의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는 의병들을 소탕시킬 목적 으로 개성 수비대의 30명, 용산 주차 보병 부대의 70명, 해주 수비대의 34명, 연안 수비대의 7명 등을 동원하여 이들을 8대(隊)로 나누어 3일 동안 의병 진압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6일 부터 시작된 수색전 첫날에 20여 명의 김수민 의병은 정두동(亭頭洞)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 군에 집중 사격을 가하여 7명 중 4명을 쓰러뜨리고 서북방으로 후퇴하여 배를 이용하여 황 해도와 주변 섬으로 이동하였다. 1909년 2월부터 김수민은 적성(積城)과 강원·충청·황해도 일대에서 연기우(延基羽)·하 상태(河相兌)·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후 적의 정보를 파악하여 더욱 완강한 항일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의진을 동 생 김백수(金白洙)에게 잠시 맡기고, 자신은 차부(車夫)를 가장하여 서울로 잠입하였으나 불 행하게도 검거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탈옥하려고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 했다. 1909년 10월 1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1월 22일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