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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향에서 의병 봉기를 시도하였다. 을미사변 이전인 1895년 7월 봉기한 김원교(金元喬)의 상원 의병 또한 봉기의 주요 요인이 갑오변란에 있었다. 이들이 발표한 격문 내용에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척사유생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의병 투쟁을 더욱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들 역시 갑오변란을 망국의 시작으로 인식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이 대표적 인물로, 그는 봉 기하면서 발표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에서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라고 통분하였다. 1896년 2월 진주에서 거의한 노응 규(盧應奎) 역시 「병인소(丙寅疏)」에서 갑오변란을 ‘6월의 변’이라 표현하여 을미사변과 같은 변란으로 인식하였다. 한편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은 갑오변란을 전후하 여 승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정(自靖)하였다. 그의 심정은 을미의병 후 체포되어 1896년 1월 23일 고등재판소에서 가진 문초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홍주 을미의병 주도자 중의 한 명인 이설 역시 갑오변란에 충격을 받고 우부승지의 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홍주로 낙향하였으 니 의병 봉기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전기 의병이 봉기하였던 또 다른 배경으로 을미사변이 있다. 을미사변이란 1895년 8월 20 일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사건을 말한다. 일제는 갑오변란 이후 조선을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러시아 세력과 제휴하려는 명성황후의 시도에 결국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국제적 범죄 행위 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침략 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다. 국모의 시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일제와 친일 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으며, 친일 내각도 오히려 폐비 조치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러한 처사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폐비 조칙이 공포되던 1895년 8 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倡義疏) 고시문이 붙었으며, 9월 초에는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 된 자로서 복수토적(復讐討賊)의 의거가 없는가”라는 내용의 고시문이 지방에도 나돌았다. 같은 해 9월 중순에 서울 종로에는 “8월 20일의 왕비 시해는 훈련대가 아닌 일본인의 소행” 이라면서 적개심을 품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 원주 지방에서는 사림들이 모여 거의(擧義)의 뜻을 드높이는가 하면 구월산에서도 명성황후 시해의 죄상을 성토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있 었다. 한편 안동에서는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인을 격퇴해야 한다는 격문이 게시되었 2. 의병의 역사적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