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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리고 양평·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許蔿)와 함께 임진강의 병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말 허위가 잡혀 순국하자, 의병부대 를 인솔하고 양주·포천·영평·연천·연안 등지의 육지와 해상도서에서 유격전술을 펼쳐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1909년 1월 초순에는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남방의 연안 도서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1월 19일에 야음을 틈 타 2척의 배에 승선하여, 연평도 지역에서 일본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 히고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같은 해 2월 27일에는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주 군 석우리 북방에서 일본 군인과 헌병 연합부대와 격전을 벌여 타격을 입혔으나, 의병 진영 에서도 수십 명의 희생을 냈다. 그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서간도로 항일 거점을 옮겨 정병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박노천과 신좌균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 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유인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3월 31일 서울의 용산역에 나타났 다가, 잠복하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내란죄’로 교 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6월 2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68) ④ 김수민 김수민(金秀敏, 1857~1909)은 경기 장단 출신으로 동학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힘이 남달리 세고 사격술이 뛰어나며 화약과 탄환의 제조 기술도 있었다.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농민운동을 조직화시켜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결심하고 음력 8월 25일에 장 단군 북면 솔랑리(率浪里)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구한국 군대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고, 덕음동(德蔭洞)을 거점으로 군량을 준비하였으며 보부상으로 정보대를 편성시켜 적정(敵情) 을 탐색할 뿐 아니라 산악 전투에서 의병을 보호할 수 있도록 복장을 소나무색으로 염색하여 입혔다. 그는 민폐를 덜기 위하여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에 충당시켰다. 1907 68)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의병과 독립군』, 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 립기념관, 1989 ;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 『북악사론』 5, 1995.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