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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 경상도의 신돌석, 전라도의 문태수, 평안도의 방인관, 함경도의 정봉준 등이 망설임없이 조사들을 이끌고 몰려들었다. 이인영은 대장에 추대되어, 기일을 정해 동대문 밖에 모여서 서울을 공략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 때문에 미쳐 양주에 진입하지 못했다. 허위가 이끄는 부대만 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분전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이인영에게 아 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는 12월 25일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일제를 소 탕하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에서 은거하다가 1909 년 6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경성지법에서 8월 13일 ‘내란수범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판결문에 의하면, 문반 출신으로 배외사상 특히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가진 자로써 지난 13년 전 당시 정부 에 반항하는 내란(內亂)을 준비하였던 사람으로 항상 통감정치에 대하여 불평의 회포를 가지 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67) ③ 이은찬 이은찬(李殷瓚, 1878∼1909)은 강원도 원주 부흥사면 출신으로,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 대 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원주에서 의 병을 일으켰다. 그는 이구재와 함께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 신은 중군장이 되어 의병 항쟁에 돌입하였다. 이인영과 함께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 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 규합에 진력하는 한편, 전국 의병장에게 격문을 띄워 양주로 집결 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로 13도창의군을 편성하고 이인영 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창의군은 서울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1907년 12월에 이인 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의진을 거느 67)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