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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부대는 고양군 일대를 점령하고 서울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무기가 열악하고 탄환이 부족하 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그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을 서울에 파견하여 고 종 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환귀(還歸), 통감부 철거, 경찰권의 회복 등 30개 조에 달하는 요 구 조건을 통감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그는 서울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 은신하던 중인 1908 년 6월 11일에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18일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 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66) ② 이인영 이인영(李麟榮, 1867∼1909년)은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정동현(鄭東鉉)의 문인으로 일찍 이 대성전 재임(齋任)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 지자,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별영장 (別營將)으로 참여했으나 제천 전투 후에는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주,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 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 대가 해산되자 의병 활동을 재기하였다. 원주에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킨 이 은찬과 이구채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1907년 9월에 그를 찾아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망설였으나, 원주로 출진,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 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관동의병대장 이름의 격문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하여 적극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에게도 격문을 발표하여 힘을 합쳐 일제 를 격퇴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의병장에 추대된 경기·강원 지역을 돌면서 의병 규합에 힘쓴 결과 군세가 크게 강화되었다. 그는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1907년 12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는 분산적인 대일 항쟁을 지양하고 전국 의병대를 결성하여 서 울을 공격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의 격문에 경기도의 허위, 황해도의 권중희, 66) 『국역허위전집』, 아세아문화사, 1985 ; 외솔회, 『나라사랑』 27(허위특집호), 1997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윤병석,『한 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1991 ; 신용하, 「허위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 탐구당, 1992.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