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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이들 중에 허위를 비롯하여 이인영·이은찬·김수민·김봉기·정용대·신현구·엄해윤 등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으며, 서영백은 종신징역형, 김규식과 정철화·김화서·한 원태·김재선·강명선 등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외에도 교수형을 받은 인물로 이성서와 박광천·정영운 등이 있으며, 10년형을 선고받은 강상봉·이연년 등이 있다. ① 허위 허위(許蔿, 1854∼1908)는 경북 구미 출신이다. 그는 관료 유생으로 1895년(고종 32)에 을 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 起夏) 등과 함께 1896년 2월 김천에서 봉기하였다. 이기찬을 대장에 추대하고 대구로 진격 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대구와 공주부 관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흩어진 군사 들을 수습하여 재봉기를 준비하던 중 고종의 의병해산령을 받고 귀향하였다. 1899년에 조정 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침략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발표하여 옥고를 치렀다. 1907년에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9월 경기도 연천 · 양주· 파주 등지 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연기우 부대와 김규식 부대까지 포섭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포천의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고 일진회원을 색출하여 포살하였으며, 철원의 우편취급소를 소각하고 일본인 순사와 친일파를 소탕하였다. 한편 그는 격문을 작성하여 서울의 각국 공 사관과 신문사에 발송하였으며, 1908년 가을에 전국의 의병부대를 양주로 집결하게 하여 13 도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인영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이 되어 1908년 1월 서 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는 정병 300명의 선발대를 인솔하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 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으나 본군의 지원이 늦어져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하자 총대장의 중책을 맡아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 면으로 나아가 박종한·김수민·김응두·이은찬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였 다. 1908년 4월부터는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에 나섰는데, 의병연합부대는 서울 외곽을 비롯 한 경기도 일대에서 치열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본국의 제6사단 제23연대와 제7사 단 제27연대를 한국에 증파하여 서울 근교에 배치하여 의병부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의병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