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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이 집결하였다. 이 연합의진은 이인영 의진의 약 1천여 명으로 시작되었으나, 얼마 안가 2천 명으로 증가했으며, 허위 부대 등 각지의 의병부대가 집결한 결과 5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이 다. 이 부대는 1908년 1월 서울 탈환 작전을 감행한 13도창의진의 기간 부대가 된 이인영 의 병장(참모장)과 허위 등의 연합의진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목표로 전국 의진에 통문을 돌리 고 작전을 개시하던 중이었다.57) 일본군은 아카쿠라(赤倉) 대위가 인솔하는 1개 중대가 11월 6일 원주를 출발하였고, 이 보다 앞서 서울에서 사카베(坂部) 소좌가 1개 중대를 인솔하여 왔 다. 삼산(三山) 전투는 11월 7일부터 2일에 걸쳐 벌어졌는데, 일본군의 포화에 다수의 사상자 를 낸 의병은, 삼산에서 철수하여 양주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연합의병에 양평에서는 김춘 수가 안무장(安撫將)으로 참전했다.58) 일본군의 양평 지역 의병 탄압은 혹독했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유서 깊은 용문사와 상원사·사나사를 불태웠다. 상원사와 용문사는 1907년 8월 24~25일간에 일본군 보병 제 52연대 제9중대에 의해 불태워졌으며,59) 사나사는 그 해 10월 27일에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60) 또한 일본군은 양평 지역에서 수많은 민가를 불태우는 만해 을 저질렀다. 1907년 8월에 지평의 수동에서 200여 호,61) 10월에는 양근읍내에서 200여 호, 사탄과 역곡에서 90여 호, 옥천에서 20여 호의 민가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62) 11월에 도 일본군은 양근읍의 민가 수백여 호를 불태웠다. 63) 강화도에서는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무장 봉기하면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해산 군인 연기 우와 지홍윤 등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주민들과 함께 강화읍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의 1차 공 격은 물리쳤으나, 2차 증원군의 공격에 지홍윤 부대는 해서 쪽으로, 연기우 부대는 장단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장단 출신의 김수민은 강화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경기도와 57) 김상기, 「한말 영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2004. 58) 「폭도에 관한 편책」원비발 제46호의1, 1907년 11월 10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04~5쪽) ; 같은 책, 한헌경을 제404호, 융희 2년 4월 9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28~9쪽). ; 신용하, 「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1987, 17~18쪽. 59) 「참(參)1발(發) 제83호」(1907년 8월 28일) 『한말의병자료』 4, 독립기념관, 58쪽.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일본 참모총장에게 “보병 제 52연대 제9중대는 24, 25일 양일 간에 적의 근거지인 상원사 및 용문사는 집적해 있던 다량의 양식과 함께 불태웠음”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독립운동사자료집』 3)에 의하면, “양근, 이천 방면으로 파견된 아카시 중대는 23일 양근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 연안막(蓮安幕)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습격하여 용문사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692쪽)고 보고되어 있다. 60) 「조선폭도토벌지」(『독립운동사자료집』 3, 709쪽) 「10월의 폭도토벌」에 의하면,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는 ...(중략)... 27일에는 양근 61) 『황성신문』, 1907년 8월 29일, 잡보. 62)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8일, 「楊邑又燒」. 63)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 잡보.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