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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1) 전기 의병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 그리고 을미사 변, 단발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관군의 연이은 패퇴에 조선 정부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제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 군은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출발할 때부터 청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로 차지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제의 하였으며, 6월 1일에는 총 27개조에 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내정 간 섭이라 거절하고, 불법 진주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철군 후에 독자적으로 개혁할 것 임을 밝혔다. 조선 정부에서는 6월 11일에 교정청을 설치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 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여 정치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에 대해 일제는 개전 결의를 분명히 하고, 6월 21일에 경복궁을 공 격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 변란은 일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의 사건이다.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열강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 하여 대원군을 유인, 입궐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는 고종에게 정무와 군무를 대원군에 위임토록 조치하였다. 더욱이 조선군의 무장까지 도 강제로 해제시켰다. 이어 부일개화파들에 의한 친일 정권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 여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사태에 격분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경부터 반개화 투쟁과 아울러 반침략 투쟁을 재개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봉기’이다. 그러나 갑오변란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를 위기상태 로 인식한 세력층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지방 유생들 역시 침략 행위로 간주하여 반침략 투 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징후는 궁궐 침범 1개월 여 후인 7월 말에 나타났다. 청풍의 유생 서 상철(徐相轍) 등이 안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격문에서 궁궐을 침입한 갑오 변란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기병하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지평의 유생 안승우(安承禹) 역시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