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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의병은 일진회원들의 농간으로 원주진위대와 연합하기 위해 원주 활곡으로 갔던 원용팔이 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체포됨에 따라 해산되었다. 원용팔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성감옥에 투 옥되어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3) 후기 의병 ① 경기 지역 1907년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는 사태에 의병의 대일 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경기·강원 지역은 도 경계를 뛰어 넘어 서로 긴밀하게 연계 하거나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경기 지역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의병 초모, 군수품 조달 등에서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경기 의병은 처음에는 남부 지역인 1907년 7월경부터 안성과 이천 지역에서 움직임 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수원·죽산·여주·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여주에서는 이구 채·김현국·윤성필이 이끄는 의병이 조직되어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기습하였다. 이 천에서는 김봉기가 양지 출신의 임옥녀와 함께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천읍내의 순사 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면서 광주·용인·죽산·양근 등지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 다. 음죽과 장호원에서는 정봉준과 방인관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동하였는데 장호원에서 일 본군경에 타격을 가한 후에 관동창의군에 가담하여 13도창의군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후반부터는 경기 남동부 지역인 양평·음죽·용인 등지로 확산되어 갔으며, 점차 이 지역은 경기 지역 의병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특히 양평 지역은 용문산이 자리잡고 있어 유격전에도 유리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의병과 일본군의 항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근읍 출신인 조인환과 권득수는 군대 해산 직후 거의(擧義)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 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1907년 8월에 양근 읍내를 습격하여 관아와 세무서, 파출소, 우편물 취급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 방화하였으며, 지평에도 들어가 관 아와 순사파출소를 습격하여 지평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9 월 상순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공격을 받고 양주, 파주 지 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와 용문사·사나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1907년 11월초에는 지평의 삼산리에 이인영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5천여 명의 의병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