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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려 김상의(金尙儀)를 승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엄성하를 수성장, 김내현(金乃鉉)을 소모장, 박제방(朴齊昉)·이긍하(李兢夏)·정이항(丁履恒)을 참모로 선임하여 지역 방어 체제를 갖추 었다. 그리고 마차(磨差, 현 영월군 북면)로 다시 행군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윤덕배(尹德培) 와 김경로(金敬魯)를 파수장, 김영두(金盈斗)와 양한용(梁漢用)을 교련장으로 삼았다. 이들 가운데 마차에서 교련장으로 선임된 윤덕배와 양한용은 1907년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이전 에 의병에 가담하여 군사교련의 책무를 담당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의병진은 다시 정선으 로 진출하여 이곳에서도 지역 방어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엄기섭(嚴基燮)을 선봉장으로 삼고 수성장에 김상규(金尙圭), 파수장에 심경화(沈景化)·전명심(全明心)·양숙도(梁叔道), 참모종사에 이상렬(李象烈)·정태영(鄭台永)·김홍근(金鴻根)·정병도(鄭炳燾)·최한섭(崔 漢燮) 등을 선임하였다. 이 시기 원용팔의 원주의병은 지방관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내부(內部)에 보고한 문건을 언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원용팔 의병대장이 처음 영월군으로 들어갈 때는 그 규모가 포군 120∼130명 정도였으나, 정선 군에 이르러서는 이미 2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불과 며칠만에 확대된 진세였다.55) 라고 하면서 대책에 부심하였음을 보여준다. 원용팔 의병의 중군 김낙중은 이 무렵 일진회 첩자 고영달과 일본인 체신부 1명을 처단하 였다. 또한 원용팔은 비밀리에 원주로 들어가 진위대 군인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약속 한 뒤 돌아왔다. 이어 원용팔 의진은 평창군 봉평으로 이동하여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진세를 강화하였다. 이곳에서는 특히 추성구·천락구·배진환·추병철과 천후근·강윤중· 강형진·곽재호·신경집 등의 동지들을 참모·종사로 영입하였다. 이어 홍천 서석에서도 권 영섭·정장화·이은상·이규원 등을 참모·종사에 임명하였다. 원용팔 의병은 이처럼 원주에서 재기한 뒤 그 동안 단양·영월·정선·홍천 등지를 전전 하면서 많은 인사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확충하는 한편, 각지로 항일 의병의 기세를 확산시켜 갔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누설되자, 정부에서는 원주진위대에게 원용팔 의병을 해산하도 록 지시하였다. 이에 원주진위대장 김구현(金龜鉉)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의병진 와해공 작을 벌인 결과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여 의병의 규모가 300명으로 격감하고 말았다. 56) 원주 55) 「의병점치(義兵漸熾)」,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0일. 56)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3쪽.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