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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 중기 의병 원용팔(元容八, 일명 元容錫, 1862∼1907)은 러·일 전쟁 개전 이후 일제의 정치·군사적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1905년 8월에 강원도 원주에서 재기하였다. 원용팔은 화서학파 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전기 의병기에는 여주 일대에서 활 동하던 심상희(沈相禧) 의진에 참가한 뒤 제천의병의 중군장을 지내는 등 의병 활동에 참여 했던 인물이었다. 원용팔은 원주의 금마둔(金馬屯)에 있던 박수창(朴受昌)을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 을 요청하였다. 박수창은 군자금과 화포 등의 군수품을 지원하기로 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내고 의병 봉기를 결의하였다. 원용팔은 8월 16일 원주 풍정(楓亭)에서 종제인 원용수(元 容銖)와 채순묵(蔡淳默)·김낙중(金洛中) 등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 박수창은 명포수인 최 병덕(崔炳德)과 정재식(鄭在植) 등을 보내 의진에 합류시켰는데, 원용팔은 이들을 좌·우 총 독장(總督將)으로 선임하였다. 원용팔은 의병을 봉기하면서 일제 침략을 성토하는 격문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구 열 강과 청국 공사관에는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그리고 일본 공사관에는 한국 침략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보냈다.52) 산림천택을 모조리 점령하고 재정과 토지를 제 것으로 만들었으며 왕실이 불탄 것과 같다. 새둥지가 엎어졌으니, 알이 온전할 리 없다. …(중략)… 가죽을 보존할 수 없는데 털을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무리[豹狼]가 우리 백성을 학대하니 악하기가 진 실로 심하고, 별볼일 없는 하찮은 무리[犬羊]가 우리의 예속을 더럽히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들을 수 없도다. 심지어는 간악한 백성이 혈당(血黨)을 널리 벌여 이른바 일진회라는 것 이 지독한 난적의 무리이니 만약 저들의 소위를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애고야 말 것이다. 또 고문(顧問)이라는 관작을 두고서 고을[州縣]의 관직을 빼앗고 전국 각지에 역당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를 그물질하고 우리 인민을 속박하였다. 요·순·우·탕 제왕 의 전통은 마침내 그림자도 없이 끊어지고 공·맹·정·주 성현의 학문은 멸망의 참변을 당 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과거 조선의 전형은 복구할 수 없게 되고 소일본(小日本)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중략)… 진실로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인 무리가 아니라면 누구 인들 저들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베고 잘 마음이 없겠는가.53) 52) 「원씨진소(元氏陳疏)」.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24일. 5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00~201쪽.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