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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권인규는 민용호 의진에서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작성한 문서들은 문집인 『소은창의록』에 수록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활동 내용과 창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소은창의록』의 의병과 관련 있는 문서로는 ‘예 안 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 창의소 포유문’, ‘관동 창의사 효유 문’, ‘서고문’ 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 가 있다. 권인규가 민용호와 만난 것은 민용호가 강릉에 들어 온 직후로 보인다. 권인규는 만남 이 후 민용호에게 큰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 의진에서 나온 그는 12월 말에 독자적 으로 「창의포고문」을 작성하여 민용호 의진인 ‘관동9군도창의소’가 설치된 사실을 널리 알리 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48) 포고문에서 권인규는 일본을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 오랑캐’라면서 철저 한 척왜론적 인식을 견지하였다. 그는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 발령과 같은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권인규의 포고문은 그가 민용호를 만난 직후인 12월말에 발표했던 것으로 보인다.49) 권인규는 1896년 설을 세고 민용호 부대에 다시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관 서와 관북 지역의 사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하였다. 여기 에서 그는 강릉 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 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箕子)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이 난세를 당하여 한번 죽 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하였다.50) 권인규는 또한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 들에게 ‘효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효유문에서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거나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 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없이 처단해야 한다”면서 일제와 그에 붙은 부일 개화파를 철저히 처단 할 것을 밝혔다. 아울러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의병에 합세 하여 일제를 격퇴하는 데 합력할 것을 호소하였다.51) 48) 『독립운동사자료집』 3, 261쪽. 49)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3, 263쪽. 50) 「창의통문」, 위책, 265쪽. 51) 「관동창의사효유문」, 위책, 273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