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page

62 여한 의병의 총수를 1천여 명으로 보고하였다.44) 민용호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고 강릉으로 집결하였다. 민용호는 각 지역의 의병장에게 격 문을 보내어 상호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영양의 김도현 의병장이 6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으며, 삼척의 김헌경 의병장과도 연합하여 삼척의 삼봉산에서 전투를 치렀 다. 4월 14일에 치러진 전투에서 의병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전하였으나 탄약의 고갈 로 인하여 결국 오십천변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민용호 부대는 6월 중순 양양 전투에서 승 리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후 고원·영흥·정평에서 활약하다가 9월 18일에 함흥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의 전력이 쇠퇴해져 결국 개마고원을 넘 어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였다. ⑤ 권인규의 강릉의병 권인규(權仁圭, 1843∼1899)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비록 나이 먹 어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도이(島夷 : 섬나라 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맹서하였다.45) 권인규 의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척사부정(斥 邪扶正)’, 즉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 병 참여를 호소하였다. 46) 권인규는 민용호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용호 의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 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송형순·이병채 등과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인근에서 의병을 모 집하였으며 12월 18일(양력 2월 1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 등 강릉의 토착 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47) 44) 민용호(閔龍鎬) 부대의 신평(新坪) 전투에 대하여는 박민영의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129∼131쪽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관동창의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이 수십 명 사망했고, 일본군은 부상자가 ‘180여 명’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5) 권인규(權仁圭)는 헌종 9년 강릉의 초당(草堂)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헌규(獻圭)이고 자는 경행(景行)이며, 호는 동빈(東濱) 또는 소운(巢雲), 소은(巢隱)이라 한다. 본관은 안동으로 추밀공파에 해당한다. 생부는 사필(思珌)이었으나 동생인 극(極)의 양자로 들어갔다. 46) 권인규, 「창의포고문」, 『소은창의록』, 『독립운동사자료집』 3, 261쪽. 47)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122쪽. 이때 군무첩을 받은 강릉의 인물로는 이승학·김노원·심홍택·정규섭·이 승찬·최돈익·김양선·임익상·정헌중·김인수·전치운·강동오 등이 확인된다.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