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page

61 였다. 관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5월초에 대장 이경응과 순문장 장한두·성익현 등은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의 민용호 의병에 합류하였다. 유중락·유홍석·김경달 등 가평 일대에서 유 격전을 수행하던 의병들은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42) ④ 민용호의 강릉의병 여주 출신의 민용호(閔龍鎬)43)는 1월 30일에 평창, 영월, 정선 지방의 포수들로 의진을 구 성하여 1896년 1월 17일 원주의 남쪽 30여리 떨어진 신림에서 이병채·송현순 등과 함께 의 병을 일으키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민용호 의진은 평창을 점령하고 1월 24일 방림에서 격문 을 발표하여 의병의 뜻을 밝혔다. 민용호는 1월 29일에 강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의진을 편 제하였다. 민용호는 강릉에 진입하여 강릉의 토착 세력을 포섭하고 경무관보 고준식을 처단 하였으며, 강릉의 선비 권인규를 초빙하여 각종 포고문을 작성하여 의병의 뜻을 널리 전파하 였다. 육지와 해안에 봉수장(烽燧將)과 망해장(望海將)을 두었으며, 무사청과 예빈소도 설치 하였다. 또한 권익현·권명수·이경한·김윤희 등을 강원도와 함경도 각지에 소모사로 파견 하여 의병 모집과 일본군 방어의 임무를 맡겼다. 민용호가 이끄는 2천여 명의 강릉의병은 원산의 일본 거류지 공격을 목표로 세우고 3월 2 일에 강릉을 출발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북상을 계속하여 3월 9일에는 고성군수의 영접을 받았다. 3월 17일 원산에서 7~80리 떨어진 안변의 신평에 도착할 즈음 폭우를 만나 진을 멈 출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군 원산수비대 병력과 원산에 정박하던 군함 다카오호(高雄號)에서 파견한 육전대는 19일 새벽 3시에 안변에 도착하여 신평에 주둔하던 의병을 3면으로 포위하고 8시 40분부터 공격하였다. 오전 10시 30분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의병들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백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을 맞아 결사 항전을 했으나 3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고 말았다. 일본군 수비대장 나카가와(中川祐須) 소좌는 3월 21일 군함 다카오호 함장인 오다(小田亨) 대좌에게 “신평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기타 서류가 너무 많아서 아직 조사를 완료하지 못했 습니다. 또 포로 여러 명을 구금하였습니다”라고 승전보를 올렸다. 그는 또한 이 전투에 참 42) 이구용, 「춘천의병의 항일투쟁」, 『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60쪽. 43) 민용호(1869∼1922)는 경남 산청의 오고(梧谷) 출신으로 청년 시절 서울과 여주로 이거하여 살았다. 자는 문현(文賢), 호는 복제( 復齋)이다. 문집으로 『복제집(復齋集)』이 있다.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