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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③ 춘천의병 춘천의병은 강원도 관찰부의 소재지인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을 말한다. 이 지역은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유중교, 유홍석, 이소응 등 척사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곳으 로 의병 봉기의 분위기는 성숙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에 춘천유생 정인회 가 군인 성익환과 상인 박현성을 포섭하고 포군 400여 명과 함께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 하면서 시작되었다.40) 이들은 단발한 박 초관을 처형하고 전 유수인 탐관오리 민두호의 생사 당을 파괴한 후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이 참여하여 의진 이 확대되었으며 1월 20일에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대장에 오른 이소응은 격문 ‘격고팔도’를 공표하였는데, 그는 ‘왜노(倭奴)’와 적신들이 국모 를 시역하고 군부의 머리를 깎은 처사에 거의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쳐 국가의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것이며 의병을 방해하는 지방관은 응징할 것 을 천명하였다. 춘천의병은 1월 28일에 단발하고 부임하는 신임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가평에서 체포, 춘천으로 압송하여 춘천부 청사 앞의 처형장 ‘개못개’에서 총살하였다. 41) 정부에서는 춘천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월 31일에 진위대 1개 중대를 급파하고 2월 5일에 는 2개 중대의 지원군까지 증파하였다. 춘천의병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2월 1일에 성익현 휘하의 의병 선봉대는 경춘가도의 안보역에 도착하여 관군과의 접전을 준 비하였다. 다음 날 관군이 가평에 주둔한다는 소식에 더 진격하지 못하고 가평의 벌업산[寶 納山]에 진을 쳤다. 춘천의병은 이충응이 거느리는 가평의병과 연합하여 관군과 전투를 감행 했으나 무기와 훈련 부족으로 춘천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대장 이소응은 그의 종제 이진응과 이경응에게 의진을 위임한 뒤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지평으로 갔으나 오히려 맹영재에게 구 속되었다. 이소응이 없는 사이에 관군의 연이은 공격으로 이진응이 전사하고 춘천 의병은 패 퇴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관군이 회군한 직후, 이진응의 동생 이경응을 대장에 추대하고 의병을 다시 모 아 3월 15일경에는 군세가 전보다 2배나 성했다 한다. 춘천의병은 재차 서울로 진격하여 3월 17일에 양근에서 20리 떨어진 광진 상류에서 한강을 넘어 이천의병과 연합 작전을 모색하였 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고 얼마 안가 함락됨에 춘천으로 회군하 40)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 『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41) 오영섭, 위글, 187쪽.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