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59 은 1896년 2월 26일 수안보 전투에서 전사하고, 중군장의 책임을 맡은 안승우 역시 5월 25 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였으며 김백선은 불행하게도 군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의진 내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양근 출신의 이승룡(李承龍)은 양근 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항 쟁하다가 관군의 꼬임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36) 이보다 앞서 광주 출신의 구연영이 이천에 서 의병을 일으키고 양근과 지평으로 와서 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이천수창의소의 주력 부대 중 하나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이승룡 역시 양근의 의병들을 이끌 고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승룡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민영환을 만나 통곡하고 양근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는 ‘척왜국모보수 지기(斥倭國母報讎 之旗)’라고 쓴 기를 30여 개 만들어 세워놓고 의병을 모아 전술 훈련을 시 켰다. 그는 가사를 아들인 연년(延秊)에게 맡기고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음력 1월초 (양력으로는 2월 하순에 해당함)에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주군수 박기 인을 체포하여 참하였다. 37) 김하락의 이천의병은 양근의병이 입성한 이후인 2월 28일(음력 1월 16일) 남한산성에 입 성한 것으로 보인다.38) 이에 대하여 김윤식도 『속음청사』에서 “양근과 광주의 비도들이 남한 산성으로 모여들어 백성들의 전곡을 거두어들이며 굳게 지킬 계획을 하여 경영병(京營兵)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대포 1문을 잃었다. 적세는 더욱 떨쳤다 한다”고 하여 의병을 ‘비도’로 보는 관리의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남한산성에 양근의 병사들이 주력 부대의 하나로 편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양근의병이 바로 이승룡이 모집하여 이끌고 간 부대로 보인다. 남한 산성의 의병은 3월 22일(음력 2월 9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성을 내주고 양근 방향으로 패산했다. 이처럼 이승룡은 2월 하순경에 양근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며, 3월 18일 양근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그는 서울의 윤모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상경하려다가 오히려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1896년 3월 27일(음력 2월 14일) 남한산성 에서 살해되었다. 39) 36) 김상기, 「한말 영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2004. 37) 이연년, 「강령공휘승룡가장(康翎公諱承龍家狀)」(필사본). 38)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17∼18쪽. 단, 김하락의 『진중일기』에서는 ‘1월 30일’(양력, 3월 13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9) 김상기, 「한말 양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2004, 150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