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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착하여 제천의병의 환대를 받았으며 유인석으로부터 합류할 것을 제의받았다. 김하락 등은 제천의병에 합세하여 전투를 수행하면서 다시 단양·풍기를 거쳐 4월 20일 안동에 도착하 였다. 안동에서 서상열 의진과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상호간 전투 방법의 차이로 인해 의성의 금성면에 있는 수정사를 거점으로 확보하고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하락 의진에서 벌인 주요 전투로는 5월 14일의 청송의 성황현 전투, 5월 20일의 의성의 비봉산 전 투가 있다. 계속된 관군의 추격에 김하락은 경주로 이진하여 경주의병과 연합의진을 설치하 였는데 경주의병의 대장은 이채구(李采九)였다. 경주 연합의진은 6월 17일에 경주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그러나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 과 대구 주둔 일본군 수비대의 경주성 공격으로 6월 23일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김 하락은 영덕에서 신돌석과 연합하여 영덕 전투를 수행하던 중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이 천의병의 항일 투쟁은 종지부를 찍었으나 제천의진, 안동의진, 경주의진, 영덕의진 등과 끊 임없이 연합의진을 편성하면서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투쟁성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② 양평의병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후에 이춘영·안승우 등 지평 출신의 화서학파의 문인 및 김백선 과 그의 추종 세력은 이를 국가의 위기로 인식하고 지평의병을 일으켰다. 지평의병은 1896 년 1월 12일 원주의 안창에서 거의하여 원주 관아를 점령하였는데, 이때의 의병의 수가 1천 여 명에 달했다. 1월 17일에는 제천 관아를 점령하였는데, 제천 일대에서 서상렬·이필희· 이범직 등 화서학파 문인을 비롯하여 의병이 합세하였다. 제천군수는 도주하였으며 의진에 서는 대장에 이필희를, 군사에 서상렬을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 안승우는 군중도유사, 김백선은 선봉장을 맡았다. 지평의병은 1월 19일에 단양의 장회협 전투에서 진위대 1개 중대와 첫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서상렬과 김백선이 거느린 포군은 추격해 온 관군을 장회협의 협곡에서 매복, 급습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 후에 지평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재공격에 대비하고자 경상 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더욱 모집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의병의 대오 이탈을 초래하고 말았다. 지평의병이 해산된 뒤에도 이춘영·안승우·김백선 등은 유인석의 휘하에서 중군 장·전군장·선봉장 등 지휘부를 맡아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군장 이춘영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