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page

57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1) 전기 의병 ① 이천의병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음, 11월 16일)에 봉기하였다. 34) 서울 에 있던 김하락은 구연영·신용희·김태원·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과 경기도 이천으로 내 려가 이천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方春植)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하여 이천의병을 결성하였다. 김하락은 우선 이천의 이현(梨峴)에 진영을 설치하고 구연영을 양근과 지평 방 면에, 조성학을 광주 방면에, 김태원을 안성 방면에, 신용희를 음죽 방면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들은 곧 9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민승천(閔承天)의 안성 의병 과도 연합하여 이천창의소를 결성하였다.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삼고 김하락은 도지휘, 조 성학은 도총, 신용희는 우군장, 구연영은 중군장, 김태원은 선봉장을 맡아 의병 항쟁에 돌입 하였다. 이천창의소는 부대를 편성한 후 3기(騎) 9대(隊) 법에 따라 전투 편제를 편성하였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이천의 백현에서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35) 이어서 이현 전투를 치룬 의병은 광주군수를 처단한 광주의병, 심상희(沈相熙)의 여주의병 등과 합세하여 2월 28일에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연합의진의 남한산성 점령은 일제 침략군과 개화정권에 매우 위협적이었음이 분명하다. 3월 5일부터 남 한산성에서 관군, 일본군의 연합 공격은 시작되었다. 연합의진은 아관파천 후 새로 조직된 친러 정권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의병진에서 파견한 밀사를 체포한 것으로 볼 때 의병과 정부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연합의진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서울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키고자 하였다. 정부에서는 참령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의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렴 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20여 일간 공격했으나 의병의 반격으로 격퇴당하였다. 그러 나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이 관군의 꼬임에 빠져 3월 22일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김하락 등은 박준영 3부자를 처단한 후 탈출하여 이후 안동·의성·경주·등지로 옮겨다니 면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4월 9일에 여주를 경유 4월 12일에 제천에 도 34)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35) 김하락, 「진중일기(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1, 1971, 585∼586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