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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다. 그는 1908년 11월 19일에 정택하(鄭澤夏)·전봉학(田奉學)·채한영(蔡漢榮) 등과 같이 홍 주군 화성면 제곡동에서 일진회원 이종국(李鍾國)을 결박하여 같은 면 용두리로 끌고가 참살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6월 1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모살죄’로 종신 징 역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6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 다. 1919년 8월에 감형되어 출옥한 후 1940년 3월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춘서(鄭春瑞, 1885~1911)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07년 4월 초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 (韓鳳洙)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였다. 4월 중에 의병 9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음력 5월 10일 괴산군 서면 사치(沙峙)에서 의병장 한봉수의 명령으로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일본군 수비대 2명을 동료 9명과 함께 일제 사격을 가하여 사살하고, 군용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약 10발을 확보하였다. 이때 이들 의진의 활약과 거점 등을 청주군 북강 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朴來舛) 이 왜경에게 제보하여 의병에 큰 피해를 입히자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11월 8일에 한봉수와 결별하고 12월에 이종칠(李鍾七) 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 외이면 양청리(陽淸里) 유 주사(主事)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하는 등 목천 일대에서 계 속 활약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드러나 체포되어 ‘내란·살인·강도죄’로 교수형이 선고되어 상고하였으나 1911년 6월에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 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