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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德)을 오갑진(吳甲辰)과 같이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09년 1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이른바 ‘폭동 및 고살(故殺)죄’로 교 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유덕삼(柳德三, 1878∼1909)은 충북 출신으로 1907년 8월 기의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인 솔하며 그중 3백명에게 각각 총기를 휴대시키고 충북 청주·보은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11월 20일에는 홍치경(洪致敬) 등 4명과 함께 경북 순흥군에 거주하는 박씨 집 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하순경에는 충북 영춘군 대곡면 해일리(海日里)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우성문(禹成文)을 원건상(元建常) 등 8명과 함께 포박하여 연행한 후 총 살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20일에는 김운선(金雲先) 등과 함께 밀정으로 파악된 충북 영춘 군의 조명숙(趙明淑)을 처단하였다. 또 1909년 음력 1월 10일에도 경북 순흥군 단산면에 거 주하는 마을 이장 안모(安某)가 의병 홍치경을 헌병에게 밀고한 것을 알고 그를 처단 응징하 였다. 1909년 2월 10월에 김운선 등 의병 여러 명과 함께 옥대리에 거주하는 목모(睦某)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그해 3월 14일에는 경북 문경군 동노소면 적성리에서 김운선 등 4명과 함께 의병이 되기를 거절한 김인호(金麟浩)를 처단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등 의 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경성공소원에서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 고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춘성(李春成, 1876~1909)은 1908년 음력 2월 충남 부여 일대에서 신여도(申汝道) 외 20 여 명을 인솔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24일에는 이종화(李鍾化)·오양 선(吳良善)·민창식(閔昌植) 등과 합동하여 80여 명이 각기 총칼을 휴대하고 보령읍내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0월 15일에는 30여 명의 선봉장이 되어 아산군 신창읍내 순사주재소 를 공격하여 군수품 50여 종을 확보하였다. 1909년 음력 3월부터는 설인수(薛仁洙)·박성돌 (朴成乭)·최봉실(崔奉實) 외 수십 명의 부하와 함께 청양·정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11월 24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유죄 판결 을 받고 공소했으나 1909년 12월 25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 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필봉(李弼奉, 1884~1950)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오양선이 이끄는 의병진에 가담하였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