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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단한 일로 1908년 8월에 김쌍봉과 함께 홍주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 김쌍봉은 이로 인해 결국 대심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김성백 역시 체포되어 비록 살인 사건을 자백하면서도 전혀 이를 반성하지 않아 유사한 선고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 나 아직 김성백의 판결문이 확인되지 않아 사후 행적은 알 수 없다. 김수동(金壽童, 1885∼1910)은 충북 영춘 출신이다. 1907년 군대 강제 해산 후 이강년· 최성천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은 1907년 7월 정미7조 약에 격분하여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에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 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해산 군인과 합류하였다. 김수동은 이강년 이 기병한 1907년 9월부터 참여하여 11월 26일까지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의병 2백여 명과 함께 경북 문경, 충북 단양·영춘, 강원도 영월 군내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일진회 회원 및 친일관료 등 매국매족 행위자를 처단하였으 며,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 까치재에서 의병장 이 강년이 적에게 체포되자, 그의 부장들은 저마다 의병을 거느리고 활약하였는데 영월 지방에 서는 김상태, 삼척 지방에서는 성익현, 영양·울진 지방에서는 변학기가 오랫동안 활약하였 다. 김수동도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때 그는 소백산을 중심으로 경술국치 직전까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간지대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의병 활동을 하던 최성천 의진에 들 어갔다. 1910년 6월 6일 경북 영천군 두내면 반구(盤邱) 시장 부근에서 영천군 봉향면 상망 동에 사는 정갑이(鄭甲伊) 및 상주군에 사는 정인수(鄭寅守) 등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정인수가 단발을 한 것을 보고 순사(巡査)이며, 정갑이 또한 밀정으로 의병 활동을 정탐하러 온 자임을 직감하였다. 이에 동료 의병 5명과 함께 그들을 결박하고 영천군 호문면 화기동 지내(地內) 반구천(盤邱川) 제방에서 처단하였다. 이 일로 1910년 10월 7일 대구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 대구공소원에서 기 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 추서하였다. 박일복(朴一福, 1883∼1909)은 충남 남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신도여 의진에 가담 하여 동료 의병 280여 명과 함께 1908년 6월경까지 충남 보령·남포·청양 등지에서 군자 금 모집을 위해 활약하였고, 1907년 11월경에는 홍산군 읍내에 거주하는 밀정 함성덕(咸聖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