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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월 5일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해미·서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력 1월 15일 밤에 당진군 하대면 석동의 강달선 집에서 담배와 음식·주류 등을 탈취하고 음력 3월 27일 밤에는 서산군 동암면 남촌의 이종우 집에 들어가 그를 납치하여 해미군 염솔 면 천의시에서 배에 태워 당진군 내맹면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부근에 구류시키고 3일 후인 3월 30일 장고항리에서 그의 아들이 가지고 온 돈 30원을 받았다. 그는 체포되어 1910년 3 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4월 19일에 공소의 이유가 없다고 기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여 공을 기렸다. 신순중(1884~? )은 당진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정주원 부대의 분대 장으로 1908년 5월 9일에 의병 여러 명과 함께 해미군 사기소리 이인정의 집에 들어가 군자 금 명목으로 4원을 거두었으며, 5월 19일 서산군 성연면 상평리에서 한태원에게 8원, 6월경 에는 성연면 창리에서 김인택으로부터 10원을, 창리의 홍모로부터 2원을 거두었다. 그는 정 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에는 신갑균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분대장이 되어 1908년 7월경에는 서산군 대산면 고하리 이영우로부터 10원, 11월 13일에 대산면 독관리의 이성윤으로부터 겨 울바지 10벌 등을 거두었다. 이 일로 1909년 1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1909년 12월 21일에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쌍봉(1880~1908)은 충남 해미군 부산면 원평리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이다. 정주원 의 병에 들어가 해미와 당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5월(음력)에 신갑순·이용백 등 30 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해미군 천의면 승비리의 남모 집에서 군자금 명목으로 2백냥 을, 당진군 구루지 이 주사 집에서 70냥을 수납하였다. 같은 해 6월 중순(음력)에는 해미군 일도면 상시평에서 일제의 밀정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에 홍주경찰서의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1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1908년 11월 6일 경성공소원에서 다시 교수형을 선고받고, 다시 대심 원에 공소하였으나 1908년 11월 25일에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성백(1883~? )은 면천군 감천면 창덕리에 거주하였는데 직업은 고용인이었다. 정주원 의병대에서 김쌍봉과 함께 활동했으며 1908년 음력 6월 해미 일도면에서 일제의 밀정을 처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