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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등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5월 15일에는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였으며 부상을 입고 하군배, 심주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선경은 1909년 5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심주현(1872~? )은 당진 남면 행정리 1통 5호에 거주하였다. 신분은 양반으로 알려졌으나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등 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정주원이 체포된 뒤인 5월 15일 에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 였으며 부상을 입고 하군배·정선경과 함께 체포되었다. 심주현은 1909년 5월 28일에 공주 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최기운 (1884~ ? )은 당진군 읍내리 출신으로 정주원 부대의 의병으로 당진·서산 일대에 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8년 6월 15일에 의병 부대원과 함께 서산의 동음암면(지 금의 음암면) 송내리에서 홍주우편국의 일본인 직원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최기운은 이날 오 전 10시경에 음암면에 와서 점심을 먹고 해미군 서면 무릉산 쪽에서 온 의병 30여 명과 함께 쉬던 중 일본인 체신부 아라키(荒木)를 만나 습격하였다. 부대원의 무기는 연발총 1정과 화 승총 14정, 스나이더총과 모젤 총 4정, 칼 2자루 정도였다 한다. 최동식은 출신지가 미상이나 정주원 의병부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정주원이 체포된 후 당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3명을 인솔하고 1909년 4월 26일 오전 4시경에 정주원을 밀고한 면천군 신북면 한진의 이윤삼 집을 급습하여 체포하였 다. 최동식 일행은 이윤삼을 체포하고 소선 2척에 분승하여 당진군 외맹면 보덕포(당진에서 동북쪽으로 약 30리) 앞바다에서 1박한 뒤 다음 날 김성일과 박화숙 집에서 명주 등 물품과 현금 1원을 거두었다. 최동식은 같은 날 오후 4시경에 면천군 창둔면 성구리로 이동하여 배 를 타고 정박해 있던 일본인 후쿠다(福田久兵衛·福田淸松) 부자를 처단하고 이들의 배를 탈 취하여 면천군 신북면 쪽으로 떠나 수원군 수근리의 후포에 내렸다. 이 사실은 최동식 의병 을 이동시켰던 배의 소유주로 보이는 면천군 창둔면과 성금리에 사는 임창실과 최선용·박 모 등이 체포되면서 알려졌다. 손응현(1880. 8~1950. 7)은 당진군 하대면 당산리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1908년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