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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정주원이 이상덕과 함께 체포된 후 정주원 부대는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안춘경은 스스 로 대장이 되어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최동식은 정주원을 밀고한 자를 체포하고 일본 인을 처단하였으며, 신현구는 죽산에서 일본인을 처단하고 이 일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 기도 하였다. 정선경과 하군배는 당진주재소를 공격하다가 체포되었으며, 황명운은 양지군 에서 일본 순사의 총에 순국하는 등 1910년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상덕(1884~? )은 태안군 하대면 출신으로 구한국 군인 참위 출신으로 알려졌다. 1908년 3월경에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당진과 면천 등지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장 정주원과 함께 활동 중 1908년 7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아산의 서방 약 40리에 있는 행해 도 부근에서 성환수비대 소속 미조타(溝田)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당 진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결국 정주원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 에서 유배형 15년을 선고받았다. 최종성은 당진 출신으로 정주원 부대의 부장으로 하군배·정선경·심주현 등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활동하였다. 1907년 5월 3일 정선경 등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 희영을 처단한 일이 대표적이다. “당진군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이다. 1908~9년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서산·해미·홍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는 하여 일제의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09년까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수사망을 피하였으 나 함께 활동한 정선경·심주현·하군배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하군배(1854~ ? )는 당진 외맹면 찬동 출신이다. 상민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1909 년 체포 당시 56세의 고령이었다. 1906년 정주원 의병의 부장인 최종성의 권유로 의병에 가 입하였다.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등 의병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1909년 1월 3일 밤에 정선경·심주현 등과 함께 당진 외맹면 송당리의 한인동 과 인노수 집에서 당목(唐木) 35척과 3원을 거두고 이어서 외창리 인문식 집에서 솥 1개를 거두었다. 5월 15일에는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였으며 부상을 입고 정선경·심주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9년 5월 28 일 공주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23일 경성 공소원에서 이를 기각하였다. 정선경(1863~ ? )은 하군배와 같은 마을인 당진 외맹면 찬동 출신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 였다. 1906년 정주원 의병의 부장인 최종성의 권유로 가입하였다.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