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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를 습격하여 물품을 탈취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들이 배를 타고 어디론가 도주했다고 보고하 고 있다. 계속해서 정주원은 충청, 경기 지역의 의병을 불러모아 연합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 경찰서를 공격했으며, 우편배달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과 함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 세 력과 의병 고발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군 상대면의 심사성(沈士聖) 처단 건은 대표적인 일 이었다. 정주원은 이를 시장에 광고하여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정주원은 각 면의 면 장에게 통고하여 결전(結錢)을 일본인에게 상납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순행하는 의병들에게 보조금을 주어 일인에게 포살되는 농민이 있는 것을 알았음도 밝혔다.32) 1908년 음력 2월 다시 안성과 양지·죽산 등지로 옮겨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중 3월 31일 오전 5시 40분경 죽산군 원삼면 능촌에서 숙영하는 일본군 이천수비대와 경찰대 연합대를 공격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6월 15일에 서산의 동음암면 송내리에서 일본 인 체신부 아라키(荒木臺藏)를 죽이고 천의를 지나 16일에는 오후 8시경에 면천군 감천면 삼 화리 이장의 기와집과 쌀 7석을 방화하였다. 이어서 당진군 읍내에 들어가 순사 전재길 집의 가구를 파괴하고 군아의 부속 건물에 방화하는 등 17일 오전 5시경까지 당진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주원은 결국 7월 19일 성환수비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7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아산의 서방 약 40리에 있는 행해도(지금의 행담도) 부근에서 성환수비대 소속 미조타 (溝田)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정주원은 일본군과의 해상 교전 이틀 뒤인 7 월 19일 아침 8시경 추격해 온 일본수비대에 의해 해미군 적서촌(지금의 당진군 대호지면 적 서리)에서 부하인 이상덕과 함께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정주원은 체포 당시 당진의 대호지 면의 차숙보의 집에 기거하였다 한다. 그는 대호지의 대성인 차씨 문중의 보호를 받으며 당 진포 건너의 천연 요새지인 적서리 방구바위(防寇巖) 산록에서 부대 훈련을 시켰는데 일본군 에게 체포된 의병의 안내를 받은 일본군에 의해 소대장 이상덕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정주원은 1908년 9월 29일 경기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1월 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형으로 감해졌다. 그 사유는 그를 ‘내란죄의 수범으로 오인’했으나 ‘내란 죄의 종범’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방 후 당진군 하대면 용두리에서 농사를 짓다 가 1925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는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당현 후록에 있다. 정부에서는 정주원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공을 기렸다. 33) 32) 홍비수제122-1호(융희 2년 3월 1일), 「暴徒ノ貼紙ニ關スル件」 부속 문서 <各面面長ニ廣告ス> (국가기록원 소장본), 『폭도에 관한 편책』 33) 김상기, 「한말 정주원의병의 항일투쟁」, 『충청문화연구』 1, 200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