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page

49 며, 이후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계속하였다. 그해 5~6월경에 는 속리산에서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6월 29일에는 괴산군 서면에서 우편물을 호위하 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그 중 일본 헌병대위 시마자키(島崎善治)를 사살하고 수송되던 세금을 군자금으로 확보하였다. 10월 1일에는 미원 헌병분견소 대원들과 격전을 벌이고 헌병보조 원 정태헌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전의·목천·평택·여주·횡성·문경 등지에서 일본군 과 30여 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괴산의 김규환, 보은의 노병대 (盧炳大), 상주의 조운식(趙雲植) 의병 등과 연합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폭도 강탈 살인’의 죄목으 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였으며 1910년 8월 29일에 이른바 ‘합방대사 령(合邦大赦令)’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에는 고종 황제의 국장에 즈음하 여 상경하였다가 귀향하여 3월 7일에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입구 마차 위에서 이태우(李 太雨)·임봉수(林鳳洙) 등과 함께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에는 내수보통학 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공 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31) 정주원(鄭周源, 1870∼1925)은 당진의 고대면 용두리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가 육군 장교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로 폐위되고 구한국 군인이 강제로 해산된 직후인 1907년 8월 죽산(지금의 경기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 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徐用凡)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100∼150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그는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 모하고 경기도 죽산·양지·수원·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25일 안성에서의 초모 모임에 참석하고, 8월 29일에 일본군과 교 전하였다. 25일 이후는 주로 죽산과 양지 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한진에서 배를 타 고 고온포에 건너가 충청도의 당진과 서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당진분파소 31)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편찬위원회, 1974.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