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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년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경의 칼을 빼앗아 자 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일본 놈의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자살 하겠다”고 결심하고 단식하여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해 제천시 고암 동 의병골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 서하였다. 최성천(崔聖天, 1885∼1910)은 충북 충주 신기리의 광부 출신이다. 1908년 김상태 의진에 가담하여 단양·청풍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봉화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후 경북 예천· 봉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최성천은 김상태 의진에 1908년 6월경부터 참여하여 활동하였 다. 그는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 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본군 수비 대의 밀정 권흑이(權黑伊)의 밀고로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 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의병 탄압이 가열되자 최성천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소부대 유격전으로 맞서기 위해 김상태 의병장과 함께 소백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 때 김상태 의병장이 소부대 유격전에 맞게 의진을 분진하였으므로 최성천은 의병장이 되어 10명~20명 정도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소백산을 근거지로 대일 항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그 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0년 1월 2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서리에서, 2월 6일에는 수곡리에 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3월 26일에는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북 예 천군 왕천(汪川) 시장에서 군수금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인 야마우치(山內銀三郞)를 처단하 였다. 그러나 1910년 4월 한명선(韓明善)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1월 12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재물탈취강도죄’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수(韓鳳洙, 1884∼1972)는 충북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출신이다. 1907년 9월경 해산 군인 김규환(金奎煥)을 만나 감화를 받고 함께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기의하여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9 월 15일에는 미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10월 28일에는 문의군을 습격하 여 군수를 처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청주의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을 처단하였으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