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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에는 백자동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 탈환을 위해 양주에 집결해 이인영을 대장으로 한 13도창의대진소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08년 봄부터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 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대담 한 유격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의병들은 엄격한 군율로 기강이 서 있었 고 지역 지리에 밝았으며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에 제 천 금수산의 작성(鵲城)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중에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다. 수원의 일 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 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순국하였 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30) 김상태(金尙台, 1864∼1912)는 단양의 영풍 출신으로 본관이 삼척이다. 1895년 을미사변 과 단발령 공포에 항거하여 1896년 이강년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이강년이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자 그를 따라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유인 석이 제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간도로 들어가자 이강년을 따라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1907 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자 정운경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 의진과 합세하였다. 제천의 의림지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을 맡았다. 이때 이중봉이 우군장, 백남규가 우선봉장, 이용로가 좌군장, 하한서가 좌선봉장, 윤기영이 전군장이 되었다. 의병대는 9월 10일에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 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에는 백자동 전투에서 큰 전 과를 올렸다. 그는 1908년에도 중군장으로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1908년 7월에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는 대장이 되어 단양을 비롯한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헌병과 교전한 것이 10여 회에 달하였 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총독 부는 그에게 상금 5백금을 내걸었고, 결국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의 고발로, 1911 년 5월에 순흥 남목리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1911 30) 『운강선생의일록(雲岡先生義日錄)』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윤병석, 『한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1991 ; 김상기, 「『보병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이강년 의진의 활동」, 『지역문화연구』 9,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10.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