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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며, 일본군과의 전투 행위는 많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후기 충청 의병은 평민 중심 으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를 편성하였으며, 일본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일진회원이나 밀정과 같은 친일 세력을 처단하는 활동을 주로 한 것으로 보인 다. 이는 충청 의병의 투쟁 방법의 변화라기 보다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위축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이후에는 충청 지역에서 그러한 활동마저도 찾아보기가 어 렵다.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 중에 이강년을 비롯한 활동이 두드러진 인물들의 행적을 소개 하기로 한다. 이강년(李康年, 1858∼1908)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8척 장신으로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고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1월에 문경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거의(擧義) 직후 안동 의병에 쫓겨 도망 중이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 (金仁覃)을 체포하여 문경의 농암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 인석을 찾아가 문인이 되고, 제천의병의 유격장으로서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 는 등 충주, 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제천의병이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 과의 전투에서 패해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가자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서 노모를 모시고 은신하였다. 1907년 4월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을미의병의 동지였던 안성해(安成海) 등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그해 8월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정미7조약으로 한국군 대가 해산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해산군인 민긍호 부대와 연 합하여 원주의 배향산에 진을 쳤다.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밀조(密詔)를 내려 도체찰 사의 직을 하사하였다. 그는 민긍호 부대와 함께 제천에서 일본군 소대 병력을 격파하였다. 제천 전투 후인 1907년 8월에는 김상태 등 40여 의병들에 의해 제천의 의림지에서 도창의 대장에 추대되고, 김상태를 중군장, 우군장에 이중봉, 우선봉장에 백남규, 좌군장에 이용로, 좌선봉장에 하한서, 전군장에 윤기영, 감군장에 이세영 등을 임명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의병대는 9월 10일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적의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고 할 정도로 대 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