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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이르렀다. 이용규는 이때 체포를 피해 전주·진안·용담·장수 등 전북 지역에서 의병을 모 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부여의 지티에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였다. 그는 참모사가 되어 의병의 홍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당하자 탈출하여 다시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다. 이용규의 활약상 에 놀란 일본군은 그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해 6월 17일에 그의 아내 박씨와 어린 아들 성문 (星文)을 칼로 찌르고 고문을 자행하여 그의 아들은 끝내 사망하였다. 그는 예산의 이남규(李 南珪) 집에서 재거를 계획하였다. 거사 일을 10월 5일로 정하고, 일단 민종식을 성우영(成佑 永)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예산 관아를 습격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0월 2일 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계획이 드러나 김가진(金嘉鎭)이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되어 이남규 부 자·곽한일(郭漢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907년 2월 평리원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일에 평리원 고등재판소에서 감 1등되어 ‘내란죄’로 종신유배형을 선 고받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1911년 10월에는 옥천 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에 밀고에 의해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같은 해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로 유배되었다. 1918 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경성지검에서 12월 19일 징역 10월 형을 구형받았으나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무죄를 선고하여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③ 후기 의병장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은 전·중기 의병에서 보여 준 관료와 지방 유생 중심의 의병이 아닌 일반 평민 중심의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1906년 5월의 홍주성 전투에서 큰 희생이 있었고, 양반 유생으로 이루어졌던 지휘부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 고 체포된 이유도 있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부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거나 의병대에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