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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하우령에 유진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득이 퇴거하여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합천에서 유진 중 일본군의 야습을 받았다. 대부분의 병력이 패산하고 박창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다행히 임금의 특 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2차 홍주의병에 참모사로 다시 참여하여 수백 명의 의 병이 산화한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후 청양 지역에서 부대를 수습하 여 다시 기의하려다가 친일분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수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전 민족적인 3.1운동을 일어남에 김복한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 였다. 이 일로 그해 6월 피검되어 공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단식투쟁을 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수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 운동의 공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한일(郭漢一, 1869∼1936)은 1906년 5월 남규진(南圭振)과 더불어 예산에서 기병하고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한 소식을 듣고 홍주의진에 합류하였다. 곽한일은 돌격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홍주성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에 일본군의 대공세 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의진은 궤멸하고 말았다. 곽한일은 성을 탈출하여 예산 지방을 중심으 로 재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예산의 한곡(閑谷, 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사는 전 참판 이남 규(李南珪)의 집에서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참모의 직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 진회원에 밀고로 거사 계획이 일본 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에 적의 기습을 받은 곽한일은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李錫樂)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 경 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곽한일은 종신유 배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2월에는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하고 온양 일대에서 모금을 계 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1913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 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1914년에 체포되 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 추서하였다. 이용규(李容珪, 1859∼ ? )는 충남의 부여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에 매부인 민종식이 예 산의 광시에서 홍주의병을 일으킬 때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홍주의병은 다음날 청양의 합천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안병찬 등이 체포되기에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