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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종식은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박윤식·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민종식은 다행히 미리 공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결국 11월 20일에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체포된 후 12월 7일과 25 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 에 대하여 민종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민종식은 1907년 7월 2일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져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순종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그의 공을 기려 대통령장 을 추서하였다.29) 안병찬(安炳瓚, 1854∼1929)은 청양군 화성에서 안창식(安昌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 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깃발을 올 린 것은 충남 홍성에서였다. 그는 1895년 12월 1일에 채광묵과 함께 부친의 지시를 받고 향 병 180여 명을 이끌고 다음날인 12월 2일에 홍주성 입성하여 김복한을 의병총수로 추대하고 조양문 위에 홍주의병진의 기치를 높히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 로 그를 비롯한 23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인사불성에 이르 기까지 하였다.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이튿날 깨어나 목에서 흐르는 피로 문종이에 혈시를 써서 관찰사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는 1896년 1월 17일 한성감옥에 구금되었으며 2월 25일 에 홍건, 송병직, 이상린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향리에 돌아와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05년 결국 일제는 을사조약을 늑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를 강행하였 다. 이때 그는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 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 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라며 결연히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의병 투쟁을 재기하기 에 이르렀다. 그는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으며 정산에 거주하던 민종식을 총 수로 추대하고 3월 14일(음력, 2월 20일)에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깃 발을 들었다. 부대 편성을 마친 홍주의진은 광시면 하장대리에서 천제를 지내고 홍주성 밖 29)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