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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전남 신안군)로 귀향갔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로 귀양갔다. 한편 안병찬·박창로·최선재·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감옥에 감금 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쪽으로 피 신하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 를 파악하였다.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에 체포되어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907 년 7월 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처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24) ③ 당진의병 당진 지역의 인사들 역시 을사조약의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당진 의병장으로 최구현(1866∼1906)이 있다. 그는 면천의 매염리 출신으로 고종 3년(1866) 태어났다. 그는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영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 공 최준립의 12대 후손으로 고종 24년(1887) 12월에 무과에 급제하고 1888년 훈련원봉사로 벼슬길에 올라 군부에서 근무하던 중인 1904년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것을 보 고 군부참서관 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창의도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면천·당진·고덕· 천의·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창의영도장’에 추 대되어 의병을 지휘하고 인근 지역을 돌면서 위세를 떨치고, 5월 10일(음력, 4월 17일) 초저 녁에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하였으 나 화승총으로 일본 경찰대의 신식 무기를 이길 수 없었다. 최구현은 죽음을 각오한 의병 36 명을 인솔하고 밤에만 행군하여 5월 16일(음력, 4월 23일)에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최구현은 소난지도에서 이들을 맞이해주는 또 다른 당진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화성창의장 홍 일초 부대 40여 명도 있었다. 이어서 5월 27일(음력, 윤4월 5일)에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등 28명이, 6월 7일(음력, 윤4월 16일)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의병 차상길 등 15명이 소난지도에 합세하였다. 24)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