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page

33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 세가와(長谷川好道)는 5월 27일 대대장의 지휘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 과 헌병, 진위대에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 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 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약 400명)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 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에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 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 다. 이때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밀 려들었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소모장 최상집, 좌익장 이상구, 참모 안항식, 돌격장 남규진, 참 모 신보균과 이식, 서기 문석환, 그리고 우익장 신현두 등 9명(홍주 9의사)은 8월 6일(음력, 6월 17일)에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嚴原)에서 감금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대마도 유 배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자행되었다. 한편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왔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재집결하여 부여와 노성 지역을 행군하여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으며, 채경 도와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감금되었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 는 대장에 민종식,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이용규· 김덕진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 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박윤식·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 을 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하여 박윤식·김덕진·정재호·황영수·박두표 등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