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age

31 었다. 정운경은 10월 11일에 단양읍으로 나가 이강년에게도 연락을 취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운경은 의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전투 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인 10월 13일에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함께 거의한 의당 박정수(朴貞洙)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와 해되고 말았다. 정운경은 군부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5년 11월에 평리원의 재 판을 거쳐 유배 10년형에 처해져 1906년 11월에 황주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1907년 12월 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22) 한편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유학자 박세화(朴世和)도 문인인 윤응선과 함께 제천의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박세화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 제 나라가 망하게 되어 도(道)와 화(華)가 더불어 망하게 될 터이니 장차 어찌 할 것인가”라 며 식음을 전폐한 지 23일 만에 순국하였다.23) ② 1906년 홍주의병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 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 투쟁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 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 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 를 추진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는 전 참판 민종 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력, 2월 21일)에 이 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 식은 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의 천장리로 삼고 항전에 돌입하였다. 의병에 참 여한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이세영·채광묵·박창로 등과 이용규·홍순대·박윤식·정재 호·이만직·성재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 을 작성하였다. 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75∼576쪽. 23)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82∼183쪽.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