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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끌고 왔으며 이명로의 횡성의병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 선봉장 김백선의 처형 사건 이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제천의병은 결국 5월 25일에 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서행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고종의 해산 조칙에 유인석은 구제도를 회복하지 못한 점과 침략군인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한 점을 들어 해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춘천·양구·안변·영흥·맹산·덕 천·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제 천의병은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의 제지로 8월 29일에 무장해제 당하였으며 유인석 등 21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은 강제 귀국 당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심양으로 들어가 현재(縣宰) 가원계(賈元桂)에게 군사 지원을 요구하였으 나, 가원계는 청국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외국과의 전쟁 사단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이 유로 거절하였다. 이로써 유인석은 청국의 원병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세 개에게 가던 길을 돌려 결국 그해 음력 9월에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들어갔다. 일 행은 그곳을 ‘복고제(復古制), 척왜독립(斥倭獨立)’을 위한 근거지로 정하고 망국단(望國壇) 을 만들어 참배하며 재기를 기다렸다.21) 2) 중·후기 의병 ① 단양의병 1905년 8월 충북 단양 지방에서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이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 은 송강 정철의 후예로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다. 정운경은 을미사변에 항거하여 의암 유인 석 의진에 참가하여 1896년 1월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평창 등지에 서 전공을 세웠던 의병장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거의한 원용팔 (元容八)이 9월에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양의 장림에서 이규석(李 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10월 6일에 단양읍으로 들어가 순교(巡校)와 서기 등을 포박 하여 장림으로 데리고 와 각 면의 포수들을 규합하도록 지시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거의 깃 발을 올리니 수일간에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의병이 모여들 21) 김상기, 「1895∼1896년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백산박성수교수화갑논총』, 1991.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