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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라의 재조(再造)를 기약하고 천일(天日)을 다시 밝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글을 보내 어 효유하는 것이 이후에 혹시라도 영을 어기고 도망가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 은 곧 역적의 무리와 같으므로 단연 군사를 먼저 옮겨 토벌할 것이니 각자 명심하여 후회하 는 일 없게 하고 적은 성의나마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펴가야 할 것이다. 17) 의병진은 주로 동일한 지역과 학통 그리고 혈통(신분)의 배경 하에 결성되었던 것이 일반 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의병진 간의 통합은 위의 성격을 충족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용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인석이 위와 같은 격문을 전국에 발표하자 원근의 유생들은 각기 민 병을 거느리고 동참해 왔다.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16일에 충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시기 의병의 총수는 1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8) 2월 17일(음력, 1월 5일)에 남한강 상류인 북창나루를 얼음 위로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군 400여 명과 지방진위대 500여 명 그 리고 200여 명의 일본 수비대가 있었으나 큰 피해 없이 충주성을 함락하였으며 관찰사 김규 식을 체포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19) 제천의병의 충주성 점령은 전기 의병에서 최대 전과로 평 가되며 이후 각지에서 의병 봉기를 고무시키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충주성 함락 후 유인석은 소모장 이범직을 호서 지역에 파견하여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 하고 선유사 신기선을 잡아 가두었다. 당시 단발을 혹독하게 강요한 자로 천안의 김병숙(金 炳肅)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20) 유인석은 각처의 의진에 연락을 취하여 합세할 것을 청하였 다. 이에 원근 지방의 의병들이 충주성으로 모여들어 제천의병은 중부 지역의 의진을 규합한 연합 의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폈다. 그러 나 2월 26일 수안보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하고 충주성 공방전에서 주용규가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제천의병은 3월 5일에 다수의 희생자를 낸 채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이강년이 의병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와 유인석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외에도 영춘에서 권호선이 포수를 이 17) 유인석,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소의신편(昭義新編)』, 1∼2쪽. 18) 「朝鮮時事」. 『東京朝日新聞』, 1896년 2월 26일. 19) 이정규, 「종의록(從義錄)」, 『독립운동사자료집』 1, 30쪽. 20) 이정규, 위의 책, 31쪽.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