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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었다. 1월 12일에 김복한 등 6명(홍주6의사)을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에 이들은 1월 17일 한 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2월 23일에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공초를 하였으며 김복한에 게 유배 10년,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에게는 장60을 선고하였다. 이어서 판사 김교헌은 이들을 불러들여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다.15) ③ 제천의병 제천의병(堤川義兵)은 1896년 1월에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이 거의한 지평의진 에서 비롯되었다. 안승우는 지평의 포군장 김백선(金伯善)을 비롯한 포수 400여 명을 주병 력으로 하여 원주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1월 17일 제천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때 서 상렬·이필희·오인영·배시강 등이 참여하였다.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한 지평의진은 단양 군수를 구금시키고 일본군과 관군을 장회나루 전투에서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 군의 계속된 추격에 의병대는 영월로 퇴진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접한 유인석은 요동행을 포 기하고 제천의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28일(음력, 12월 15일)에 (총대장에 추대 된) 유인석은 의진을 제천으로 진격시켜 관아를 접수하고 관아 뒷산인 아사봉에 본영을 설 치하였다. 그리고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을 임명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전국민의 항일전 참여를 호소하였다.16) 그는 격문에서 소중화의 조선이 왜의 침략과 이를 방조한 개화파 관리들의 ‘개문납적(開門 納賊)’으로 금수의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밝힌 뒤 일제 침략의 전초가 된 갑오변란으로 부터 조선은 망한 바나 다름없으나 그를 이어 국모 살해와 단발의 화가 계속됨에 각도의 충 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무릇 각도의 충의지사는 다 같이 성조(聖朝)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환난을 피하는 일이 죽음 보다 심함이 없으니 망하기를 기다림보다 토벌함이 나을 것이다……(중략)……여기서 감히 먼저 일어난 처지에 이렇게 포고하는 것이다.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신민에 이르 기까지 그 누가 절박한 마음이 없을 것이랴. 이야말로 참으로 존망의 시기이니 각자가 거적 자리에서 자고 창을 베게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라도 들어가고 불에라도 뛰어들어서 이 15) 김상기, 「1895∼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 1990. 16)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