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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유성의병은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0월 28일에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 중군 백낙완과 이 인 찰방 구완희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 (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으나 매복했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敗散)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 비하였다.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었으니 잠시 숨어 후 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순 검들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개화정권의 구조적 모순 타파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격퇴라는 민족 적 과제를 쟁취하지 못하였으나, 을미사변의 비보에 한국인이 즉각적으로 일제와 친일 내각 에 항거하였으며 나아가 단발령 공포 후 의병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유성의병은 회덕의 송근수, 진잠의 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과 협조 속에서 가능하였다. 또 한 송준길의 후손인 송도순과 김경여의 후손인 김성의 등의 참여는 유성의병이 향촌 유림 세 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반침략 항일 의병을 전개하였음을 알려준다. ② 홍주 을미의병 홍주 을미의병은 청양의 안창식 등 재지 유생들과 김복한 등 홍주 지역 관료들의 연합으로 전개되었다. 안창식 등은 을미사변의 비참한 소식에 접하고 의병 모집·무기 수집 등의 구체 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이들의 의병 추진은 11월 15일에 단발령이 공포된 후 더 구체화 되어 갔다. 한편 홍주 출신의 김복한과 이설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의 직임을 띠고 고종을 보필하였 으나 청·일 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1894년 6월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두문불출하던 이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복한은 이설 과 홍건을 만나 협의하였으며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거병을 권하였다. 그는 이승우의 거절을 받고 11월 27일에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을 만나 의병을 협의하였다. 이미 부친 안창식과 함 께 의병을 준비하던 안병찬은 김복한과 의기투합되어 다음날 11월 28일에 화성의 강변에 사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