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age

25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1) 전기 의병 ① 유성의병 1895년 8월 20일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과 일제가 사건의 책임을 부인하고 명성황후에 대해 폐비 조치를 내리자 조선인의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한 항쟁이 개시되었다. 8월 23일부터 9월 사이에 창의소 고시문이나 복수토적을 외치는 고시문과 각종 방들이 서울 도성 안에 나붙고, 지방 각지에서 의병의 조짐이 거세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병 투쟁은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된 9월 18일에 문석봉(文錫鳳)의 유성의병(儒城義兵)에서 시작되었으 니 을미의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14) 문석봉(1851∼1896)은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되어 충청도에 내려왔다. 문석봉의 의병 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시작되었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 해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민영환 등을 만나 의병의 뜻을 밝혔다. 민영환은 문석봉에게 환도를 풀어주며 격려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과도 서울에서 만 났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에 편지를 보내어 의병을 격려하였다. 대 전 지역의 좌의정 출신인 송근수와 신응조 같은 유학자들도 문석봉의 뜻에 찬동했다. 문석봉은 9월 18일(양력, 11월 4일)에 충청도 유성에서 의기를 들었다. 문석봉은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선봉에 김문주, 중군에 오형덕, 군향에 송도순을 임명하는 등 지휘부를 조직하 였다.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幼學)으로 문석봉과는 동학군 진압을 위한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던 동지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 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문석봉은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공격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고,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하여 회덕현을 급습하였다. 10월 20일(양력, 12월 6일)에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백여 명의 의병이 유성 장터에 모였다. 문석봉은 이를 인솔하고 다음 날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나 의병에 합세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세경은 오히려 의병의 14) 김상기,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5합집, 1992.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