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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3월31일 금요일 7 (제123호) 기획 앞서2회에걸쳐,필자는경애왕의죽음이함의하고있는몇 가지 점들을 역설하였다. 경애왕은 신라 55대 왕이자 최후의 박씨왕이라는 점, 박씨 일문의 뿌리인 경명왕의 동복아우라 는 점, 기록상 포석정에서 주흥에 빠져 있다가 견훤의 침입을 받아 피살된 인물인 점,그 추문으로 말미암아 천년 이상의 세 월 동안 무능, 부패, 부정, 패륜의 이미지로 역사의 낙인이 찍 힌인물이라는점등이었다. 아울러, 새삼 경애왕을 둘러싼 비정은, 박씨 일문에겐 지울 수 없는 해묵은 가슴의 상처를 걷어내는 일이며, 현재 시점에 서 필히 곱씹어 비정해야 할 역사의 과제이자 숙원임을 밝혔 다. 경애왕의 죽음은 927년 정월부터 이루어진 왕건의 상반기 공세에 이어, 견훤의 첨예한 하반기 반격이 교차하며 살육의 전조가 현실화 한 시점,곧 동란의 와중에 터진 일대 사건이었 다. 경애왕 죽음이 있은 927년은 전쟁의 한 해였다. 경애왕 치 세(924 ~ 927)를 통틀어 927년에만 왕건과 견훤 사이 휴전이 없었다. 븮한빛신문븯 2월호의 표에서 정리하였듯이, 927년은 924, 92 5,926년과 달리 휴전이 없었다. 경애왕의 치세 전체를 통틀어 견훤의 3차례 공세, 왕건의 2 차례 공세, 3차례의 휴전이 반복되는 등, 혼전이 거듭됐으되, 특히 그 중에서 927년은 1월에서 경애왕이 죽음 전후까지 치 열한 공방이 계속됐다.말하자면 927년은 살벌한 전쟁이 시종 지속된 한 해였다. 경애왕의 죽음은 이러한 전쟁의 연속성에 서조감할때만이,핍진한진면목을헤아릴수있다. 왕건과 경애왕은 927년 정월 3일 용주 공격을 단행했다. 유 사 이래 지켜져 오던 정월 세시 축제 기간의 허를 찌르는 전격 전의 감행이었다. 왕건은 이후 8월 8일까지 문경 일대에 체류 했다. 한데 정월~8월에 걸쳐 견훤의 군사 대응이 보이지 않는 다.견훤의 즉각적 군사 대응이 없었던 점,8개월 뒤 견훤의 공 식적 대공세가 개시된 점 등에서 견훤의 절치부심, 암중모색 이엿보인다. 927년 9월, 마침내 견훤은 총공세에 나섰다. 예고된 견훤의 처절한 복수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견훤의 친정,곧 근품 성 공격을 필두로 한 공세는 926년 4월 이후 16개월 만의 일로 서,가깝게는 927년 1월 왕건과 경애왕의 협공 작전 이후 여덟 달동안의침묵을깬중대사건이었다. 견훤의 공격이 927년 9월 이뤄졌다는 것은 실은 견훤이 친 정(親征)한 본진의 공식 이동을 의미함에 불과하다. <삼국 지>에서 여몽이 백의도강(白衣渡江)의 방법으로 ‘전투 이전 의 전투’를 개시하여 승세를 굳힌 것처럼, 뇌수(腦髓)가 도지 (塗地)하는살벌한전시임을고려할때,9월보다훨씬이전견 훤이 정찰대를 전역(戰域)에 침투, 암약케 하고 있었다고 봄 이 병법의 상식에 가깝다. 결국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적침조 차깨닫지못할만큼주흥에빠져있을상황이아니었다. 일찍이 왕건과 견훤의 전황을 꿰뚫을 만큼 전쟁에 식견과 관심을 가졌던 경애왕이었다. 그런 그가 견훤의 침공이 지닌 살벌한 속성을 몰랐을 리 없다. 경애왕이 적침을 간파하지 못 할 만큼, 주흥에 빠져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서술은, 삼국의 상황과대비할때순전한주작(做作)에가깝다. 견훤은 앞서 왕건이 차지한 경북 내륙을 초토화했다. 견훤 은 왕건 진영을 계속 몰아 부칠 수 있었음에도,예봉을 남으로 선회했다. 이어 문경, 성주를 거쳐 영천(고울부)로 남하했다. 영천에 둔진을 꾸린 견훤은 서라벌을 호시하며 설(세, 說)유, 심리전을가하며경애왕을압박했다. 왕건의 방관적 자세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었다. 왕건은 경북 북부 지방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군으로 하 여금,견훤을 추격토록 하는 조치를 일절 취하지 않았다.고울 부(영천)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던 왕건으로선 의 외의행동이었다. 견훤의 압박, 왕건의 방관, 신라 내 반란 세력의 준등 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경애왕에게 있어 ‘현실 속 악몽’, ‘위기 의시간’이도래한셈이었다. 안팎의 위기 속에 군기를 점검하고 활을 쏘고 말을 달려야 할 시기, 시종 신료와 여자를 데리고 경애왕이 질펀한 연회를 열었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자 당시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사건으로서,누가봐도괴이하다. 견훤이 갑자기신라서울에들어가니,이 때경애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다가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애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으 로 돌아갔다. 시종하던 관원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 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경애왕을 잡아 다가자기앞에서죽였다.(<삼국사기>권50열전10견훤)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적병이 오는것을모르고있었으므로 갑자기어찌할줄 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 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 라고 진땀 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 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조) 위 <삼국사기>의 문면대로 경애왕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술을 들이킬 혼군이라면 어찌 왕건과 견훤의 대립 이 매 전환점을 맞는 순간마다, 독전(싸움을 독려)의 편지를 보냈던 것인지, 아니면 매순간 독전의 편지를 보낼 만큼 전쟁 에 대한 깊이,관심,기민함을 유지했던 경애왕이 정작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의 순간에 대책 없는 주정뱅이가 되 었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풀리지 않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다.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다. 왕건과 경애왕은 공수동맹의 처지였다. 당시 후삼국의 군세는 1강(견훤) 1중 (왕건) 1약(경애왕)의 형세였고, 강한 견훤에 대항해 나머지 둘의합종이진행된상태였다. 한데 경애왕의 구원 요청과 관련한 <삼국사기>기록에선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뚜렷이 드러난다.우선 경애왕이 왕 건 에 게 구 원 을 요 청 한 시 점 을 들 수 있 다 . <삼 국 사 기 >에 서 는 견훤의 근품성 공격→고울부 공격→경애왕의 구원요청→ 왕건의 출병 채비→신라 왕도 침입으로 시점을 설정하고 있 다. 반면, <삼국유사>는 근품성 공격→경애왕의 구원 요청→왕 건의 출병 채비→고울부 공격→견훤의 ‘시림(始林)’ 공격의 순서로 되어 있다.모름지기 <삼국유사>는 927년 포석정 사건 직전일련의추이에대한재배열을담고있는셈이다. <삼국유사>는 경애왕의 구원 요청이 견훤의 근품성 공격 직후 이루어진 일로서, 애당초 <삼국사기>의 주장과 달리 견 훤의 대공세 초반에 이미 고려에 대한 구원 요청이 있었음을 밝힌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왕건이 출병을 미루고 시 일을 끌고 있던 중 견훤의 고울부,시림 침입이 잇달아 나타난 것이라부연하고있는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유사>는 은연중 왕건의 사태 방기와 책임회피를비판하고있다고해석된다. <삼국유사>는, 가-1) ⑤ 10월 왕건이 출병 채비를 했다는 사실을가-2)④에서재인용하고있다.한데,10월이라는사항 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분명히, 9월 견훤의 근품성 공격이 이뤄졌기에, 11월 견훤의 왕도 침입이 있을 때 까 지 약 두 달 간 왕 건 이 실 제 적 출 병 을 하 지 않 고 시 점 을 조 율 하며실상방관했다고밝힌셈이된다. 당시송악에서서라벌왕도까지의도달시간은어떻게되는 것일까?그에관한단서가남아있다. 나-1)四年春二月丁酉新羅王遣大守謙用復請相見.辛亥王如 新羅以五十餘騎至畿內先遣將軍善弼問起居羅王命百官迎于郊堂弟相國 金裕廉等迎于城門外羅王出應門外迎拜. 븮高麗史븯 권1 세가1 태조 신성대 왕14년2월조 나-2)冬十月壬戌新羅王金傅遣侍郞金封休請入朝.王遣攝侍中王鐵侍郞 韓憲邕等往報. 十一月甲午羅王率百僚發王都士庶皆從之. 香車寶馬連亘三 十餘里道路塡咽觀者如堵沿路州縣供億甚盛. 王遣人問慰. 癸卯羅王與王鐵 等入開京. 王備儀仗出郊迎勞命東宮與諸宰從衛而入館于柳花宮. 븮高麗史븯 권2세가2 태조신성대왕18년11월조 위의 나-1)을 보면 931년 2월 9일, 김부는 태수 겸용을 보내 왕건의서라벌입성을요청했다.이에왕건은겸용이도착한9 31년 2월 9일(丁酉) 송악을 출발, 같은 달 23일(辛亥) 왕도에 도착했다. 대략 하루당 80 리를 달려, 송악-왕도까지 약 1,100 리를13일에주파한셈이다. 또 나-2)를 보면, 935년 11월 3일(甲午), 김부가 서라벌 왕 도를 떠났고 9일 만인 935년 11월 12일(癸卯),그 행렬이 송악 외곽에 도착했음이 확인된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연 달아 30여 리에 뻗치고 도로가 꽉 메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러 싼 것 같았고 사인(士人)들이 뒤따랐음에도, 더욱 한겨울 북풍을 거슬러 감행한 장정임에도 천 백리 길을 하루 에120여리씩을달려도착한셈이다. 927년의 상황은, 나-1), 나-2)보다 급한 전시 상황이었 고, 신라 구원을 목적으로 했기에 기동성을 수반한 정기(精 騎)로구성된군대였어야한다.그렇다면송악~서라벌왕도까 지의 소요 시간은 더욱 단축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9월~11 월 사이 1만에 달하는 고려 구원군의 자취는 일절 간취되지 않는다. 경애왕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대략 6가지로 압축된다. 1) <삼국사기>경애왕조, 2)<삼국사기>경순왕 논왈조, 3)<삼국 사기> 열전 견훤조, 4)<삼국유사> 김부 대왕조, 5) <삼국유 사> 김부 대왕 항목 말미에 붙어있는 史論, 6)<삼국유사> 후 백제견훤조등이다. 요컨대 <삼국유사>, <삼국사기> 각각 3군데에 걸쳐 경애왕 의 죽음을 논하고 있는 셈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 다 약 150년 뒤의 책이다. 또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쓴 것 이며,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일군의 사관들이 합작 한, 국가 주도의 역사서이다. 정확히 말하여, <삼국사기>에는 필히 고려 왕실의 힘이 깊이 개재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삼 국유사>는 보다 국가 권력에서 자유로웠다고 단언할 수 있겠 다. 우선 위의 기록 중에서 2)<삼국사기>경순왕,5)<삼국유사> 김부 대왕조의 차이점을 확인하여 보자. 두 기록은 10곳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양자의 차이를 일별,표로 작성하면 다 음과같다. 위의 내용 중 주목되는 것은 ⑤,⑥이다.⑤와 ⑥을 보면 <삼 국사기>에서 분명 ‘경애’,‘경순’이라고만 명기되어 있음에도, <삼국유사>는 ⑤에서 ‘경애왕’, ⑥에서는 ‘경순’이라고 하여 엄격히차별하고있다. 곧 경애만을 높여 특별히 왕을 부가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모든 종류의 <삼국유사> 판본에서 동일하다. 결국 <삼국유 사>는 동일한 <삼국사기> 사론을 전재하면서도 경애, 경순에 대해엄격한구별,또는획정을시도하고있는셈이다. 이처럼 <삼국유사>가 경애왕에 대해 각별한 호의를 지니고 있다면, 경애왕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전 기록과는 다른 접근 방법 내지는 인식의 틀을 보여줄 것이라 믿어진다. 필자는 이 러한 점에서, 향후 <삼국유사>를 경애왕 죽음을 파헤치는 비 밀을 담은 ‘코드’로 활용할 것이며, 이를 토대로 논지를 전개 하여나갈것이다. 927년은 치열한전쟁의한 해였다.그서전을촉발한장본인 이 왕건과 경애왕이었다. 무릇 전쟁은 국가의 안위, 군민(君 民)의 생사가 달린 일이므로 섣불리 개전할 수 없고, 예후 역 시 주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孫子曰 兵者, 國之大事. 死 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孫子兵法>〈始計篇〉1) 그 점을 고려할 때, 고려의 첩모망은 완산주를 정점으로 그 물망처럼 후백제 전역에 침투해 있었을 것이고, 세작의 눈과 귀, 발을 통해 견훤의 일거일동부터 거병 조짐까지 완산주에 서왕건에게십분전해졌다고보인다. 앞서 927년 정월 3일븡8월 8일까지 왕건은 경북 내륙에 위치 한 후백제의 둔영을 기습 공략하였다. 이후 일대의 지역은 왕 건의 군대가 새로 차지하였다. 왕건의 군대가 견훤에 의해 심 각한 공격을 당했다면, 일대에 자리한 고려 진영의 첩보망으 로부터 일각일각 패전과 관련한 급보를 받았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한데경애왕의구원요청까지왕건은선제적대응을취하지 않고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경애왕의 구원 요청 이있을때까지견훤의침입을몰랐던것처럼묘사되고있다. 9월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태운 후, 신라(新羅)의 고울부(高鬱府)를 기습하고 나아가 수도 부근까지 바짝 이르자 신라왕(경 애왕)이연식(連式)을보내어위급함을알려왔다.왕(왕건)이시중(侍中)공 훤(公萱)과 대상(大相) 손행(孫幸) 및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 를,“신라는우리와서로좋았던지가이미오래인데지금위급함이있으니 구원하지않을수없다.”라고하였다.(<고려사>권1세가1태조10년9월조) 왕 건 은 신 라 구 원 요 청 이 있 기 전 까 지 전 황 을 전 혀 인 지 하 지 못한 것처럼 의뭉스레 말하고 있다.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기록의문면은사실일까? 927년 9월 견훤이 거병, 친솔한 병력의 규모에 대해 기록은 침묵하고 있으나, 경북 내륙 일대를 초토화 할 만큼 강력하고 규모를 갖춘 총공세였다. 이처럼 군수, 식량, 등의 조달을 포 함한 대규모 거병이 있었는데도 왕건이 세작의 보고를 전혀 받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전황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거짓이다. 견훤의 수도 완산주에서 근품성(문경 산양) 일대까지의 거 리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는 160.95㎞ 국토정보원, 지리정보 플랫 폼(http://map.ngii.go.kr/ms/map/NlipMap.do)“국토정보맵”의 거리측정 , 도로망을 따라서는 대략 213㎞∼223.87㎞로 확인된 다. SK네비게이션T맵.완산주(전주)근품성(문경산양) 당시 송악~서라벌까지의 진군 속도를 고려할 때,이 정도의 거리는 대략 6.656일~6.993일이 소요된다.이는 현대식 터널을 통과하는 경로란 점에서 당시 완산주~근품성 일대의 도달 거 리, 소요 시간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전국적으로 역도 (驛道)나 간선(幹線)이 조성된 것은 고려 이후부터였기에 당 시 길다운 길은 없었다고 보인다.이동 중간 소소한 국지전 역 시 있었다고 봐야 한다. 족히 열흘의 거리와 시간을 요했음은 짐작하기어렵지않다. 견훤의 거병-근품성까지의 열흘, 서라벌-송악까지 신라 사 신의 여정 열흘을 합치면 20일이 넘는다. 그처럼 긴 시간, 긴 공간에걸쳐견훤의군사가움직이는동안왕건이치보(馳報) 를받지못했다는것은말그대로억설이다. 하지만고려시대기록은이러한원초적이고기본적인사항 마저 외면하고 있다.견훤의 개전-신라 사신의 구원 요청까지 시간차가 있었으니, 왕건이 견훤의 침입 전모를 몰랐다는 것 은심각한자기모순이다. 또 하나 이태 전(925년 10월 9일(己巳) 고울부의 능문(能 文)이 왕건에게 내투(來投)하자, 서라벌 왕도와 인접하므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는 구절 <三國史記>권12신라본기12경애왕 2 년조,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4년 10월 10일조 에 비추어 견훤의 침 략이 있을 경우 왕건 자신과의 공조,서라벌 왕도의 호위 등을 부탁한 내용이 포함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천이 가진 지리적 중요성, 능문이 왕건의 각별한 믿음 아래 돌아간 사실 을 종합할 때,고울부의 수장 능문이 견훤의 고울부 침입 과정 을 왕건에게 치보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실제 927년 이후에도 능문의 생존이 확인된다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 따라서 그 와 휘하 무리의 전사 및 전멸로 인해 통신이 두절되었을 개연 성도없다. 모든 사실을 종합할 때,왕건은 세 루트를 통해 견훤의 동정 을 파악하고 있었다.첫째,완산주를 비롯한 백제 강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보고망,둘째,경북 내륙에 둔영을 구축한 고려 군의 치보,셋째,왕도의 인후(咽喉)라 할 고울부 능문의 보고 등세갈래를통한상황파악이가능했다. 신라 구원 사절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까지 왕건이 즉각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평소 경애왕에 대하여 견마지로의 충심을 지녔 다고 술회,역설하고 있다. ‘以申犬馬之勤.再擧干戈’(<三國史記>권5 0열전10견훤및<三國遺事>권2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왕건 이견훤에게보낸서한’) 한데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군사적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 때, 왕건이 경애왕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도무지 포착할 수 없다. 그토록 사모하고 충심을 맹서했다던 대상, 경애왕이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처했을 때, 왜 왕건은 용기있는즉각적행동을취하지않았는지의아하다. 그 결과 신라 경애왕이 구원요청을 하는 것,그 기록 자체부 터 공수 동맹의 심각한 모순이다. 신라를 구한다는 왕건의 말 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修辭)로서, 역설적으로 다름 아 닌왕건의적나라한방관을보이는확증인셈이었다. 경애왕이 처한 공전의 위기를 놓고 왕건은 이후 더욱 놀랍 고도 기상천외한 ‘헐리우드 액션’, 이를테면 공전의 생 쇼(Sh ow)를펼치게된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2) 뱚Ⅰ. 927년 왕건과견훤의각축 뱚Ⅲ.일연과경애왕 뱚▶다음회에계속 박 순 교 뱚Ⅱ.경애왕의구원요청 뱚Ⅳ.왕건의방관과경애왕의위기 연번 내용(다-1) <삼국사기> 내용(다-2) <삼국유 사> 1 ① 爲之實事. ① 爲實事. 2 ② 講習 ② 誦習 3 ③ 而奉浮屠之法 ③ 然而奉浮屠之法 4 ④ 於是時也 ④ 於是時 5 ⑤ 景哀加之以荒樂 ⑤ 景哀王加之以荒樂 6 ⑥ 若敬順歸命太祖 ⑥ 若敬順之歸命太祖 7 ⑦ 亦可嘉矣 ⑦ 亦可佳矣 8 ⑧ 則必覆其宗族 ⑧ 則必覆其(家)宗族 9 ⑨ 而顯宗自新羅外孫 ⑨ 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10 ⑩ 陰德之報者歟 ⑩ 陰德也歟 11 ⑪ 敬順王 ⑪ 金傅大王 연번 내용 <삼국사기> 내용 <삼국유사 > 1 가-1) ① 秋九月, 萱攻取近品城 가-2)① 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 2 가-1) ② 燒之, 가-2)② 燒之 3 가-1) ③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4 가-1) ④ 新羅王求救於太祖 가-2)③ 新羅王求救於太祖 5 가-1) ⑤ 冬十月, 太祖將出師援助, 가-2)④ 太祖將出師. 6 가-1) ⑥ 萱猝入新羅王都. 7 가-2)⑤ 萱襲取高鬱府.[今蔚州.] 8 가-2)⑥ 進軍族始林.[一云鷄林西郊]卒入新羅王都 9 가-1) ⑦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가-2)⑦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 10 가-2)⑧ 時由是甚敗 11 가-1) ⑧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12 가-1) ⑨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13 가-1) ⑩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14 가-1) ⑪ 至前 컴 之 15 가-1) ⑫ 便入居宮中 16 가-1) ⑬ 强引夫人亂之 가-2)⑨ 萱强引夫人亂之. 17 가-1) ⑭ 以王族弟金傅嗣立 가-2)⑩ 以王之族弟金傅嗣位 18 가-1) ⑮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가-2)⑪ 然後虜王弟孝廉. 宰相英景 19 가-1) 뛝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가-2)⑫ 取國[帑]珍寶. 兵仗. 子女. 百工之巧者自隨以歸 20 가-1) 뛞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 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가-2)⑬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 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 其貫.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 목 차 Ⅰ.927년왕건과견훤의각축 Ⅱ.경애왕의구원요청 Ⅲ.일연과경애왕 Ⅳ.왕건의방관과경애왕의위기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