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age

2017년3월31일 금요일 2 (제123호) 창간 10주년 기획 본보창간10년이래시조대왕의탄강사실을비롯한10왕의 역년기를 창간 초에 다룬바 있으나 새롭게 구독하시는 분 의이해를돕기위해지난호에이어이번호는시조대왕비의 탄강사싱을게재해보며, 알영정은시조대왕비의탄강지이다.그러나많 은성손들을 비롯 인터넷 매체에서 숭덕전 추보헌 뒤편의 조경된 우물 을알영정으로소개하고있어시조대왕비의탄강에대해삼 국유사와삼국사기의내용을비교해본다. (편집자주)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께서 시조대왕(始祖大王)과 ①같은 해,같은달,같은날,알영정(閼英井)에서탄강(誕降)하시다. <註> ①.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 : 한 나라선제지절원년(漢宣帝地節 元年)임자년(壬子年)3월초1일. (原文:始祖大王妃.與始祖大王.同年同月同日.誕降于閼英井.) ①한(漢) 나라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 子).3월초하루.용이알영정(閼英井)에나타나왼쪽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으니, 늙은 할미가 있어 받들어 기르며 우물의 이름(알영)으로써이름했다. <註>①.한(漢)나라선제(宣帝).지절(地節)원년(元年).임자(壬子):B.C6 9년. (原文:漢宣帝.地節元年.壬子.三月朔.龍現於閼英井. 左脇. 生女兒.有老 좁 .奉而育之.以井名.名之.) ①두 성인(二聖)은 나이 열 세 살에 이르러 ②오봉(五鳳) 원 년(元年).갑자(甲子)에 남자(男子)가 왕위(王位)에 올라서 여 자(女子)를왕후(王后)로삼았다. <註>①.두성인(二聖):시조대왕과시조대왕비. ②.오봉(五鳳)원년(元年).갑자(甲子):B.C57년. (原文:二聖年至十三歲.以五鳳元年甲子.男立爲王.仍以女爲后.) 가.삼국사기:신라본기제1.시조왕(始祖王)5년조. “5년[B.C53]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 편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낳으니,한 노파가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다.그리고 그 우물의 이름으로써 이름을 지었 다.자라나 덕스러운 용모가 되었으니 시조가 듣고 맞이하여 왕 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內助)를 잘해서 그때 사람들 이두성인이라했다.” (原文:五年春正月.龍見於閼英井.右脇誕生女兒.老넒見而異 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 行.能內輔.時人謂之二聖.) 나.삼국유사:신라시조(新羅始祖)혁거세왕(赫居世王)조. “ 븣시인(時人)이 서로 다투어 치하(致賀)하기를 ‘이제 천자 (天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德)있는 여군(女君)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날(是日)에 사량리(沙梁 里) 알영정(閼英井:혹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 함) 가에 계룡 (鷄龍)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동녀(童女)하나를탄생(誕生) 하 니 (혹 은 용 ( 龍 )이 나 타 나 죽 으 매 그 배 를 갈 라 동 녀 (童 女 )를 얻었다한다.)자태(姿態)와얼굴은유달리고왔으나입술이닭 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빠짐으로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궁실(宮 室)을 남산(南山)서록(西麓)에 세워서(지금 창림사(昌林寺)) 두 성아(聖兒)를 받들어 기르니, 사나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은 박과 같았다. 향인(鄕人)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므 로 인(因)하여 그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여자(女子)는 그의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이성(二聖)의 나이 열 세살이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에 남자(男子)가 왕 (王)이 되어 그 여자(女子)로 왕후(王后)를 삼고, 국호(國號) 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속(俗)에 경자(京字) 를훈하여서벌(徐伐)이라이르는것도이까닭이다.)이라하고 혹은사라(斯羅)또는사로(斯盧)라고도하였다븣.” <註>㉠.이날(是日):전한(前漢)지절(地節)원년(元年)임자(壬子)3월초1 일.시조대왕(始祖大王)께서탄강(誕降)하시던날. (原文:븣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 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 井(一作娥利英井) 邊, 有鷄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 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鷄치 . 將浴於月城北川. 其치 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븣.) 1).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의 탄 강사실(誕降事實)에 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 (三國遺事)의 내용이 많이다르다.다시 한 번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1).삼국사기:시조대왕5년조. “5년[B.C53]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 편갈빗대에서계집아이를낳으니븣”하여, 서기전53년봄정월.용의오른편갈빗대에서알영왕후(閼英 王后)가탄생하였다라고되어있고, (2).삼국유사:신라시조혁거세왕조. “ 븣이날(是日)에 사량리 알영정(閼英井:혹은 아리영정(娥利 英井)이라 함.)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동녀(童女) 를탄생하니븣”하여, 서기전 69년 3월 초 1일. 계룡의 왼편 갈비에서 알영왕후(閼 英王后)가탄생하였다라고되어있다. <註>이날(是日):한나라선제지절원년임자년(漢宣帝地節元年壬子 年:B.C69년).3월초1일. 1). 신라(新羅)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의 탄강사실(誕降事 實)에관하여탄강(誕降)한해는서기전53년봄정월이며탄강 (誕降)한 곳은 용의 오른편 갈빗대라고 한 삼국사기의 내용과, 탄강(誕降)한 해는 서기전 69년 3월 초 1일이며 탄강(誕降)한 곳은 용의 왼편 갈비라고 한 삼국유사의 내용 중, 어느 설(說) 이 과연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 탄강사실(誕降事實)의 진실 (眞實)을말하는것일까? 2).우리나라 고대사(古代史)는 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 국유사(三國遺事) 외에는 달리 고증(考證)할 사기(史記)가 없 으니 신라(新羅)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 탄강사실(誕降事 實)의 진실(眞實)도 제3의 고증(考證)에 의하여 객관적(客觀 的)으로 입증(立證)할 방법(方法)은 없고, 삼국사기(三國史 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앞븡뒤 사록(史錄)들을 비교(比 較)하고 분석(分析)해 보았을 때 어느 설(說)이 보다 이치(理 致)에 합당(合當)한가를 찾는 방법(方法)으로 진실(眞實)을 고증(考證)할수밖에없다. (1).진실(眞實)의고증(考證). 뱚①삼국사기(三國史記). ⅰ).시조혁거세거서간(始祖赫居世居西干)조(條) . “시조의 성은 박(朴)씨,이름은 혁거세다.전한(前漢)효선제 (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 4월, 병진(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 함.)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이다.그때나이는열세살이었다” (原文 :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 曰正月十五日)卽位.號居西干.時年十三) ⅱ).시조혁거세거서간(始祖赫居世居西干)5년조(條) . “5년[B.C53]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 편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낳으니,한 노파가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다.그리고 그 우물의 이름으로써 이름을 지었 다.자라나 덕스러운 용모가 되었으니 시조가 듣고 맞이하여 왕 비로삼았다” (原文 : 五年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넒 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及長有德容.始祖聞之.納以爲妃) <註> B.C69 - 53 = 16으로, 시조대왕과시조대왕비의나이차이는열여 섯살이된다. ⅲ).시조혁거세거서간(始祖赫居世居西干)17년조(條). “17년[B.C 41]에 왕이 6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慰 撫)했는데 왕비 알영도 따라갔다.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토지에서 얻는 이익을 다하게 했다.” 라고 하였는데, (原文:十七年.王巡撫六部.妃閼英從焉.勸督農桑.以盡地利.) <註> B.C 69 - 41= 28, B.C 53 - 41= 12로, 이때시조대왕의 나이는스 물 여덟살이 되고시조대왕비의나이는열두살이 된다. ⅳ).이와같이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始祖赫居世居西干) 조(條)와 동 5년 조 및 17년 조를 비교(比較)하여 분석(分析)해 보면, 시조대왕(始 祖大王)은 28세의 나이에 12세의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를 데리고 6부를 순행(巡幸)한 것이 되는데, 과연 이 역사(歷史) 의 기록(記錄)이 이치(理致)에 합당(合當)한 진실(眞實)이라 할수있겠는가? ②삼국유사(三國遺事). ⅰ).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조(條). “ 븣전한 지절원년 임자 3월 초 1일에 그 알을 깨어보니 모양 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 이날에 사량리 알영정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편 갈 비에서 동녀 하나를 탄생하니븣두 성인(二聖)의 나이 열 세 살 이 되자 오봉 원년 갑자에 남자가 왕이 되어 그 여자로 왕후를 삼고국호를서라벌또는서벌이라하고븣” (原文 : 븡前漢地節元年壬子. 三月朔......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因 名赫居世王. 是日. 沙梁里閼英井邊. 有鷄龍現. 而左脇. 誕生童女. 二聖年至 十三歲.以五鳳元年甲子.男立爲王.仍以女爲后.國號徐羅伐.又徐伐븣.) ⅱ). 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 居世王) 조(條) 에 의하면,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시조대왕비 (始祖大王妃)의 탄강(誕降)은 B.C 69년 임자년(壬子年) 3월 초 하루로써 같은 해,같은 달,같은 날,탄강(誕降)하였는데,시 조대왕비(始祖大王妃)는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가 에서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로 탄강(誕降)하였으며, 두 성인 이 열 세 살이 되던 해, 즉 서기전 57년 갑자년(甲子年)에 시조 대왕(始祖大王)이 왕위(王位)에 올라서 알영(閼英)을 시조대 왕비(始祖大王妃)로맞이하였다.라고하여, ⅲ). 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記錄) 은 전 븡후 의 사 록 (史 錄)을 비교분석(比較分析)해 보아도 전혀 이치(理致)에 무리 (無理)가 없으니,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 탄강(誕降)의 진실 (眞實)은 이치(理致)에 합당(合當)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설(說)을따라야할것이다. (2).탄강(誕降)의진실(眞實). 신라(新羅) 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 탄 강(誕降)의 진실(眞 實)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설(說)에 따라서 신라(新羅) 시 조대왕비(始祖大王妃)는서기전69년임자년(壬子年)3월 초 1 일. 알영정(閼英井)에서 용의 왼편 갈비로 탄강(誕降)하였다 라고해야할것이다. 알영정과시조대왕비(始祖大王妃)탄강 (誕降) 시조대왕비탄강유지비각- 1931년(辛未)에후손해철(정국군后)이 비문을 찬(撰)하였다. 뱚1.탄강(誕降) 뱚2.탄강사실(誕降事實) 뱚■사서고증(史書考證) 뱚3.두사서(史書)의상이(相異) 알영정-비각뒤에있으며안전을위해돌을덮어두었다. 뱚4.두탄강사실(誕降事實)의진실(眞實) 알영정(閼英井))은 오릉원(五陵園)안에 있으니 우물터 에 비(碑)를 세우고 비각(碑閣)을 세우다. 비문(碑文)(國 譯) 건덕(乾德)이 비록 건장(健壯)하다 곤(坤)의 순(順) 한 배합(配合)이 없으면 만(萬)을 낳아 기를 수 없으므 로 주역(周易)에 건곤괘를 첫머리로 삼았고 문왕(文王) 의 덕(德)이 비록 성(盛)하다 해도성녀(聖女文王后妃 太似)를 배필(配匹)로 삼지 않았다면 남국(南國)의 덕 화(德化)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에 시경(詩經)에 관저 편(關雎篇)을 첫 머리에 얹은 것이니 신라(新羅)의 시 조왕(始祖王)은 하늘이 내리신 성군(聖君)이시다. 어찌 신성(神聖)한 왕비(王妃)로 하여금 배필(配匹)을 짓지 않으시리요 백성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을 보고 낙랑(樂浪)의 침입군(侵入軍)이 철수(撤收)하였고 남 의 나라의 재앙(災殃)을 요행으로 삼지 않으시고 조문 (弔問)하는 예(禮)를 폐하지 않으셨나니 이것이 비록 시조왕께서 덕(德)을 닦으시고 인정(仁政)을 행하심이 나 왕비(王妃)께서 내조(內助)하신 성덕(盛德)이 스스 로 나타난 것이다. 하물며 육부를 순시(巡視)하여 농상 (農桑)을 장려(?勵)하실 때 왕비(王妃)께서 수행(隨 行)하시와 길삼하는 여공(女工)을 검사(檢査)하는 풍 속이 지금까지 쇠하지 않으니 이것이 모두 순후(淳厚) 한유풍(遺風)이다. 아 ! 양신성(兩神聖)의 덕업(德業)이 끊임없이 길이 이어져서 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婆娑 王) 지마왕(祗摩王) 일성왕(逸聖王) 아달라왕(阿達羅 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등 九왕이 계승(繼承)하사 二百三十三年을 향국하시와 석씨 김씨의 여러왕과 아울러 一千年의 길고 긴 정치(政 治)를 이룩하였으니 아! 거룩하시다. 그러나 지금에 와 서 현저히 나타난 분은 오직 파사왕(婆娑王)과 경명왕 (景明王) 두분의 후손이다. 파사왕(婆娑王)의 후손(后 孫)에는 충열공(忠烈公) 휘(諱) 제상(提上)이 있고 경 명왕(景明王)의 후손(後孫)으로는 팔공(八公子)가 계 시니 밀성대군(密城大君) 휘언침(諱彦?)과 고양대군 (高陽大君) 휘언성(諱彦成)과 속성대군(速成大君) 휘 언신(諱彦信) 죽성대군(竹成大君) 휘언립(諱彦立) 사 벌대군(沙伐大君)휘언창(諱彦昌)과 완산대군(完山大 君) 휘언화(諱彦華) 와 강남대군(江南大君) 휘언지(諱 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휘언의(諱彦儀)이다. 기후 (其後)에 또 반남(潘南) 무안(務安) 울산(蔚山) 강릉 (江陵)등 여러 본관(本貫)이 있고 자손(子孫)창성하여 국내(國內)에 고루 분포(分布)하여 명공거향(名公巨 鄕)과 문장도덕(文章道德)과 충신(忠臣) 효자(孝子)의 선비가 뒤를 이어 배출(輩出)하니 하늘이 신성(神聖)의 후손(后孫)을 도우심이다.오릉원안에 알영정이 있으니 시조왕비께서 용의 옆구리에서 탄강(誕降)하신 곳이다. 라정(蘿井)과도 멀지 않으니 라정에는 비(碑)가 있고 알영정에는 표석(表石)이 없으니 길가는 사람이 가르쳐 탄식하기를 다같이 성인(聖人)이 탄강(誕降)한 곳인데 후손(后孫)들이 숭봉(崇奉)하는 것이 고르지 못함이 옳 겠느냐. 내동생 전현릉참봉(前顯陵參奉) 해린(解麟)이 가서 봉심(奉審)하고 탄식하며 우리들의 잘못이라 목욕 하시던 곳도 읍(邑)에서 표석(表石)이 있고 활쏘던 곳 에도 그 마음에서 잊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비(聖妃)께 서 탄 강 하 신 곳 을 잊 을 수 가 있 으 리 요 하 고 드 디 어 우 물 위에 비(碑)를 세워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妃) 탄강 유지(誕降遺址)라고 새기노라. 시조왕 기원후신라(紀 元後新羅)千九百八十八年辛未에 시독(侍讀)박해철(朴 海轍)은 찬하고 판서박기양(判書 朴箕陽)은 전자(篆 字)를 쓰고 본전참봉 박찬배(朴瓚培)는 삼가 쓰고 참봉 (參奉) 박해린(朴海麟)은 삼가 세우고 주사(主事)박태 진(朴泰鎭)이감독하였다. 알영정비역문(閼英井碑譯文) (사)숭덕전보존회/ (사)신라숭덕전릉참봉협의회/ (사)신라시조왕숭모회/ 시조왕릉참봉 박성규/ 남 해왕릉참봉 박남현/ 유리왕릉참봉 박진선/ 지마왕릉참봉 박철균/ 일성왕릉참봉 박세무/ 아달라왕 릉참봉박병승/신덕왕릉참봉박무흠/경명왕릉참봉박진석/경애왕릉참봉박돌희 문의전화:010-3816-3352 전참봉박동준 호 소 문 숭덕전은남한유일의국전(國殿)으로박씨성손의성지입니다. 세종11년창건하여,경종3년에숭덕전(崇德殿)이라편액이내려지고초대 박천근(朴天根)전참봉을시작으로현재제221대박동준전참봉에이르렀 습니다. 그리고우리박성(朴姓)의후손들은숭덕전을중심으로돈목(敦睦) 돈종(敦 宗)하여왔음에도이를부정하고숭덕전을유린하고위상을스스로무너뜨 리며 사전 (私殿)으로만들고있어 개탄(慨嘆)스럽기짝이없습니다.이에전국의성손 여러분에게간절히호소합니다. 숭덕전을지켜주십시오. 1. (사)신라오릉보존회박낙규이사장은지난 2월11일취임사를통해“우리신라오릉보존회는숭덕전을중심으로 뭉치고단결 하여새로운역사를창조해야합니다.”라고하였습니다. 2. 그리고3월7일고유례를가진후시,도본부장으로 구성된숭덕전운영자문위원회의에서오릉보존회는숭덕전춘향대제에2 천만원을지원하여제례는전참봉주관하에봉행하도록하고,오릉보존회에서는숭덕전을인정하고숭덕전에서는오릉보존회를 인정한다면법적소송을취하 하겠습니다.라고의결하였습니다. 3. 그럼에도불구하고전참봉을강제퇴거시키려고진행중인명도소송을취하하지않고, 3월15일팩스공문을통해3월7일숭 덕전전례위원회에서본인스스로 선포한 헌관 분정등제례에관한 의결사항을뒤집어버리고, 춘향대제에숭덕전의전,릉참봉들을배제하고경주의종친3명으로 집행위원회를구성하여봉행하도록지시하는만행을저질 렀습니다. 4. 3월17일에는측근30여명을동원하여시조왕을상징하는숭덕전기(旗)를내리고, 예빈관을강제점거하여전참봉의비품을 무단으로 치우고,19일개좌및20일춘향(春享)에전참봉을비롯한 릉참봉11명의참례를경호원을동원하여강제로 막는등숭덕 전역사상있을수없는일을자행하고유린하였습니다. 5. 특히양산재에서천거된 집례관 및 대축관의 천망(薦望)을취소하는어처구니없는일을 자행함으로서경북 및 전국유림들 에게망신을당하고숭덕전을일부 적폐조직의私殿으로 전락시키고말았습니다. 6. 종친회장이라는직함은성손을위하여봉사하는자리임에도개인의권력행사수단으로 이용하고있습니다. 이것은우리성 손의명예를훼손하고종친회를망치게하는행위입니다.이에오릉보존회이사장의행위를규탄하고,숭덕전의전통을수호계승 할수있도록성손들께서힘을보태어주실것을간곡히호소합니다. 2017년3월 일뱚 숭덕전전참봉박동준뱚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