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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2월28일 화요일 7 (제122호) 기획 2017년 1월호 븮한빛신문븯에서 필자는 다음 사항을 역설하였 다. 신라 왕조를 통틀어 10명의 박씨 왕이 있고, 경애왕은 그 중 마지막 박씨 왕이라는 점,박씨 각 일문이 경명왕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그의 친동생인 경애왕과 관련한 제반 문제는 긴 요하고 중요한 문제에 해당한다는 점, 까닭에 경애왕과 연관 된 추문, 비행은 필히 해명해야 할 ‘박씨 일문의 영원한 숙제’ 라는점등이었다. 신라경애왕을둘러싼해석은크게두가지로정리된다. 첫째는, 천년 이상 유지되어 온 전통적 견해로서, 경애왕이 견훤의 적침을 눈앞에 두고서 포석정에서 흥건한 주흥에 빠 져불의에주륙을당했다는내용이다. 둘째는이를수정한최근의해석으로서,경애왕이남산에서 호국을 기원하는 행위(이른바 불계, 팔관회 등)를 하다 비운 의 죽음을 맞았다는 내용이다. 한데 적의 침입 시점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초미(焦眉)의 상황에서, 경애왕이 신의 가호에 기대어무사안일만을빌었다는것은받아들이기힘들다. 둘째의견해는경애왕을천하의주정뱅이로몬첫째의견해 만큼이나생뚱맞긴매한가지이다. 지금껏제시된제반해석들은다음의사항들을결여하고있 다. 경애왕이 처한 시대, 서라벌 안팎의 정세는 어떠했던가. 절 체절명의 기로에 처했다고 해야 할 포석정 사건의 전후, 대관 절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경애왕은 누구이며 어떤 성정(性 情)을 지녔으며,견훤은 어찌하여 경애왕을 필히 제거하지 않 으면 안 될 주적으로 여기게 된 것일까.유감스럽게도 정작 이 런사안에대한최소한의설명과관심,고민조차전무했다. 우선포석정사건두달전의상황을살펴보자. 927년 9월, 견훤은 오랜 침묵을 깨고 18개월 만에 거병, 친 정에올랐다. 충분한 계획과 섬세하고 정밀한 타격 수순, 목표 하에 경북 내륙의 왕건 진영을 일거에 제압하였다. 치열한 공방조차 없 어 기록의 문면(文面)대로라면, 견훤은 마치 어미 새가 버린 알을줍듯,무풍지대를종횡한것처럼보인다. 그런 다음, 견훤은 왕건 진영을 계속해서 밀어붙일 수 있었 음에도그렇지않고예봉을남으로돌렸다. 더욱주목되는것은견훤이남하하며화공을동원한청야작 전을 감행, 기마가 먹을 일대의 목초와 군량을 깡그리 없앴다 는점이다. 엄밀히 고려 군대의 남하, 혹은 일대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 들 병략, 전술을 구사한 셈이었다. 이것은 세력이 보다 약한 경애왕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왕건과 경애왕 둘 중 하 나 의 거 세를 통해 고려와 신라 연합의 붕괴를 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중요한것은경애왕자신이이러한견훤의의도를간파하지 못했을리없다는점이다. 왕건의 방관적 자세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927년 9월, 견훤은근품성을거쳐고울부로남하했다. 한데 왕건은 경북 북부 지방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군으로 하여금, 견훤을 추격토록 하는 조치를 일절 취하 지않았다. 고울부(영천)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던 왕건으 로선, 의외의 행동이었다. 이태 전(925년) 고울부의 능문(能 文)이 왕건에게 투항의 의사를 표하자, 영천이 가진 지리적 중요성을 거론하며 각별한 믿음 아래 능문을 돌려보낸 사실 을 종합할 때 고울부를 서라벌 왕도를 수호할 마지노선으로 삼았음은확인이가능해진다. 한데고울부의능문은견훤을방어하지않았다. 왕도의 수문장 역할을 포기한 능문은 927년 이후에도 생존 이 확인된다.말하자면 왕건이 강조한 ‘왕도의 울타리’가 결사 항전을포기한채없어진셈이었다. 왕건 역시, 그토록 중시한 고울부가 견훤에게 떨어지려는 순간에도 남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애왕의 구원 요청이 있기 전까지,마치 사건의 전모조차 전혀 알지 못한 듯 기록에 선나타나고있다. ‘견훤의 친정(親征)’=‘심각한 위협의 도래’임에도 경애왕이 구원 요청을 할 때까지 왕건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자체부 터,왕건의뚜렷한방관을드러낸다. 견훤은 마침내 고울부(영천)에 둔영과 진채를 꾸렸다.이어 서라벌로의 침입을 꾀하며, 조야(朝野)를 대상으로 심리전과 이간책을감행했다. 전력의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상대인 서라벌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트려 끝내는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자중지란(自 中之亂)의유도였다. 경애왕에게 있어 술판은 커녕 1분 1초조차 민첩한 대응이 아쉬운,비상한상황이도래한것이었다. 견훤의 공세, 왕건의 방관, 신라 내 반대세력의 준동 등이 목전에 펼쳐지는 당시 상황은 경애왕에게 있어 필경 사면초 가의시간이었다. 걱정과 근심으로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지만, 잠을 자 되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되 그 맛을 모르고 아 름다운 미녀들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종과 북의 아름 다운소리조차도귀에들어오지않을‘위기의시간’이었다. 언필칭격랑의시대,백척간두의자락에서경애왕의포석정 주연은애초불가한것이었다. 븮삼국사기븯의 문자나, 시인묵객들의 시가 전하는 바대로 경 애왕이 혼용무도하였고, 적침을 앞에 두고서도 주흥에 미칠 정도로‘천하의주정뱅이’였다고치자. 그렇다면 견훤은 경애왕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적시(敵 視)하지는않았을것이다.굳이경애왕거세를위해몸을피로 하게하고부심(腐心)할필요조차없었을것이다. 혼군(昏君)의 실정이 도드라져 자신에게 떨어질 반사이익 이 눈에 엄연히 보이는 즉, 세인(世人)들과 더불어 경애왕에 게 설사 손가락질을 했을지언정 구태여 제 손으로 반드시 죽 여 시군(弑君,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의 멍에를 몸소 덮어 쓰기를모의하진않았을것이다. 요컨대경애왕은술에취해자신의생명은아랑곳하지않는 ‘천진난만한 주정뱅이’가 아니라 견훤에게 있어 필히 제거하 지않으면안될,눈엣가시였다. 또한 서둘러 교체, 거세해야 했을 만큼, 경애왕이야말로 견 훤 자신의 통일 여정에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질 만큼 적잖은 비중을지닌존재였다. 경애왕이 사망한 927년을 포함한, 당시의 기류를 조감하지 않으면 경애왕의 죽음에 접근할 수 없다. 경애왕 치세를 통틀 어후삼국의동향을일괄정리하면다음의표와같다. <표참조> 경애왕(924년-927년)의 치세 3년 동안 당시 후삼국 간에는 ㉠견훤의 공세(①) ㉡휴전(②~⑤) ㉢왕건의 공세(⑥~⑦) ㉣ 휴전(⑧~⑩) ㉤견훤 공세(⑪ ~뛝) ㉥휴전(뛞) ㉦왕건 공세 (뛟~뛨) ㉧견훤공세(뛩~뛹)등이얽혀있다. 경애왕의 치세 전체를 통틀어,견훤의 3차례 공세,왕건의 2 차례 공세, 3차례의 휴전이 반복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전 의연속이었다. 이렇게 보면 경애왕의 치세(924-927)는 전쟁과 분리해서는 일점일획도 얘기할 수 없거니와, 병사들의 흘린 피에 방패가 뜰정도로참혹한전쟁의시대였다. 그 속에서 경애왕은 불면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시종(始 終)왕좌를불안하게지킨것이었다. 더욱이 924년, 925년, 926년에는 제각기 한 차례의 휴전이 있었으나유독경애왕이죽은927년에는휴전조차없었다. 말하자면 927년은 전쟁의 어두운 구름이 더욱 감돌았던 살 벌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한 해였다. 기록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 견훤)에전하는포석정의술판은전쟁의어떤사전전조조차없는평화로 운 시기의 어느 날, 느닷없는 견훤의 침입이 있었음을 전제로 하여서만, 성립할수있는일련의맥락과 얘기일수있다 . 924년, 925년, 926년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견훤과 왕건 은 각기 세 차례 휴전했다.924년의 휴전( 표의① )은 경애왕이 즉위하기두달전의일이었다. 반면 925년의 휴전( 표의⑧ ),926년의 휴전( 표의뛞)은 경애 왕재위시의일이었다. 경애왕은 925년과 926년 휴전에 즈음하여 왕건에게 독전 (싸움을독려)의편지를보냈다. 경애왕의편지가이처럼소략했다고는생각되지않으며,장 문의 내용과 수사(修辭)로 가득했을 것이로되, 대강의 요지 는전쟁을재촉한것이었다고판단된다.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하지만, 짧은 요지로 압축 된 경애왕의 편지 두 장( 표의⑩, ⑮ )은 경애왕의 성정(性情) 을 말 그대로 대변하여 주는 육성에 가깝다. 까닭에 가히 ‘일 자천금(一字千金)’의 가치와 위력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 다. 925년10월왕건과견훤은조물성에서직접부딪쳤다. 왕건과 견훤이 명실공이 친정(親征)한 대회전(大會戰)이 었다.이윽고왕건은싸움을포기한채회군하려하였다. 당시 왕건의 처사에 맹장 유금필만이 극력 반대한 것이 확 인 된 다“사람의마음은알기어렵사오니어찌가벼이 적(敵)과 서로 가 까이 하겠습니까”(『고려사절요』권1태조신성대왕8년10월) 이처럼미묘한찰나에경애왕은왕건에편지를보내다음의 요지를전하였다.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甄萱反覆多詐, 不可和親.) 『삼국사기』권12 신 라본기12 경애왕 2년, 『高麗史』권1 세가1 태조 8년조,『고려사절요』 권1태조신성대왕8년10월 유금필과 경애왕의 생각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한데 왕건은 경애왕의 말을 옳다고 수긍하면서도 끝내는 경 애왕의말을청종하지않았다. 왕건이 견훤과의 결전을 재촉한 경애왕의 말을 끝내 듣지 않은셈이었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 부르고 인질을 보내 견훤과 휴전했 다. 기실 왕건은 줄곧 견훤과의 접전을 회피하는 등, 방어적 자 세를취했었다. 왕건의 군세(軍勢)는 견훤의 그것과 비교하면 시종일관 열 세였다 “사료를 검토할 때 『삼국사기』의 기사가 사실에 가까우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진(견)훤군의 압도적 우세로 인하여 곤 경에 처한 왕건이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먼저 걸화(乞和)하고 인질 을 보내고 상보(尙父)라 칭하는 굴욕을 감수했으리라고 보겠다.”(문경현, 븮고려태조의후삼국통일연구븯,형설출판사.1987,p.131) 견훤의고백처럼왕건의군세는견훤의절반에미치지못했 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조 . 왕건이 스물에 개경 왕성 축성의 책임자가 되고 스물일곱 에 나주 10여 성을 얻고, 서른에 사화진의 승첩에 이른 것은 그 가문의 탁월한 재력, 또는 무소불위를 자랑한 궁예의 후광 에힘입지않았다면처음부터불가능한것이었다. 왕건의손길을통해궁예의휘하에들었던충청지역은궁예 의죽음이있자마자모조리왕건에게서돌아섰다. 그들은궁예를주군으로섬겼고왕건에겐그마음을끝까지 허락하지않았다. 왕건의 군공(軍功)이란 호가호위(狐假虎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왕건이 서둘러 나주 토호의 딸과 결 혼했던 것은 이런 사정을 간파한 데 말미암은 열등감과 불안 감,초조함의소산이었다. 왕건과 견훤의 화친은 여섯 달 뒤(926년 음력4월), 백제의 인질진호가고려에서죽으면서깨어졌다. 견훤은 크게 분노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까지 진군했다. 왕건은 일선 여러 성에 수성(守城)을 명할 뿐,일절 응전치 못 하게 했다. 경애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결전을 재촉 했다. “견훤은약속을위반하고군사를일으켰으므로하늘이반드 시돕지않을것입니다.만약대왕이 한 번 북 을 울 려 진 격 해 위 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三國 史記』권12신라본기12경애왕3년4월조『高麗史』권1세가1태조9년 조 14개월 전, 경애왕은 왕건과 견훤의 화의를 결렬시키고자 견훤을폄하했었다. 이번에는왕건을‘대왕’이라부추겨뜻을이루려하였다.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을 이이제이의 대상이 아닌, 대등한 결속을 도모하는 동맹자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고, 상대인 왕건에게 인지시켜 줄 현실적 필요에서 이처 럼정치,외교적수사(修辭)의사용이있었다고믿어진다. 하지만 왕건은 ‘견훤의 죄가 넘쳐 자멸하기만 기다린다.’는 해괴한답변만을전할따름이었다. 전쟁과 견훤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경애왕이었다. 경애왕이 수차에 걸쳐 전쟁과 관련한 주문을 한 것이나, 견훤 을 향한 판단력이 고려의 전설적 무장 유금필과 궤를 같이하 고 있 는 점 『三國史記』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2년 11월조,『高麗 史』권92열전권5諸臣 유금필은무시할수없는대목이다. 동시에 그런 섬세한 촉각을 지닌 경애왕이, 하필 자신의 위 험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도처에 도사린 불확실성,생존의 문 제를 앞에 두고 태연하게 주연을 베풀며 해롱거렸다는 것은 심각한역설이아닐수없다. 927년 정월 3일, 소극 일변도였던 왕건은 다시 전쟁터에 모 습을드러냈다. 그것은 경애왕과 왕건의 용주(축산, 현 예천) 연합 공격이 었다.소극적이던 왕건의 전력을 감안할 때,그를 적극적 공세 로 끌어내고 변화를 이끈 것이 경애왕의 노력과 역할에 힘입 은것임은의심의여지가없다. 까닭에 927년 정월 3일, 경애왕이 왕건을 재촉하여 용주 공 격을 단행한 것( 표의뛟, 뛠)은 필경 후삼국 동란의 분수령이 었으며, 유사 이래 지켜져 오던 정월 세시 축제 기간의 허를 찌르는전격전의감행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견훤에게 있어, 전쟁을 재촉하고 견훤 자신 을 적시하는 경애왕은, 필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확실히 각 인되는순간이기도했다. 왕건은 경북 내륙 북부와 충청 일대를 석권하였고 이후 8월 8일까지문경일대에체류했다. 한데 정월∼8월에 걸쳐 견훤의 군사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 견훤의 즉각적 군사 대응이 없었던 점, 8개월 뒤 견훤의 공식 적 대공세가 개시된 점 등에서, 견훤의 절치부심, 암중모색이 엿보인다. 927년9월,마침내견훤은총공세에나섰다. 예고된 견훤의 처절한 복수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926 년 4월 왕건과 휴전( 표의뛞)한 지 17개월만의 일이었고, 927 년 정월 왕건과 경애왕 연합 공격( 표의뛟 )을 받 은 지 8 개 월 만의일이었다. 그간경애왕은주요고비마다왕건에게견훤과의싸움을재 촉하였다. 경애왕은왕건과견훤이벌인싸움의추이를정확히간파하 고 있 었 다 . 더 불 어 절 묘 한 타 이 밍 을 두 고 화 약 (和 約 ) 에 반 대 했다. 신라에서 광범위한 세작(細作븡첩자)을 파견, 가동하지 않 았다면 있을 수 없는 얘기이다. 더군다나 경애왕은 전쟁에 소 극적인 왕건의 입장을 변화시켜 927년 전쟁의 서막을 열게 했 고소용돌이에끌어들였다. 경애왕과 왕건의 공수동맹이 협공의 형태로 가시화(표의 뛠)된 이상, 견훤이 약한 경애왕을 거세(去勢), 동맹의 한 축 을 무너뜨려 힘의 우위를 결정지으려 획책할 위험성은 더욱 높아졌다. 927년 9월 견훤의 예봉이 전격적으로 남쪽으로 선회, 고울 부로 향하는 순간부터 견훤의 칼날은 일각일각 서라벌, 보다 정확히는 경애왕을 향하고 있었다. 경애왕에게 있어 죽음의 그림자가서서히다가오는순간이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븡재위924-927 ) 전황 번호 연대 내용 출전 견휜 공세 ① 924 .7 甄萱, 아들須彌康과良劍 等을보내어曹 物郡을攻擊. 高麗史 권1세 가1태조7년7월 휴전 ② 924 .8 甄萱, 使者를 왕건에게 보내 絶影島(釜 山市 影島區)의총(옥색)馬 한필을바침 高麗史 권1 세 가1태조7년8월 ③ 924 .9 新羅王昇英이薨하고그아우魏膺이경 애왕으로 卽位, 선왕의 喪을 왕건에게 來 告하니 왕건이 擧哀하고 齋를 設하여 冥 福을빌고使臣을보내어弔問 高麗史권1세 가1 태조 7년 9 월 ④ 925. 10.9 買曹城 將軍 能玄이 使人을 보내어 왕건 에게降服을請. 高麗史 권1 세 가1태조8년9월 ⑤ 925. 10.9 高蔚府(慶尙北道 永川) 將軍 能文(황보 능장)이士卒을거느리고왕건에게來投 삼국사기권12신 라본기12경애왕 2년조 高麗史 권1 세 가1태조8년10월 왕건 공세 ⑥ 925. 10.9 왕건이 征西大將軍 庾黔弼을 보내어 百 濟를攻擊 高麗史권1세가 1태조8년10월 ⑦ 925. 10.15 왕건, 군사를 거느리고 甄萱과 曹物郡에 서會戰, 征西大將軍 庾黔弼 합세하자견 훤 화 친 요청 高麗史 권1세 가1태조8년10 월 휴전 ⑧ 925. 10.15 왕건, 堂弟 元尹 王信을 人質로 交換하고 甄萱이十年의年長者이므로尙父라稱. 高麗史권1세가 1태조8년10월 ⑨ 925. 10.15 왕건, 甄萱을 군영에 초치, 회동하려 하 자, 유금필이“사람의마음은알기어려우 니 가벼이 적(敵)과 서로 가까이 할 수 없 다”며만류. 高麗史節要 1 권 태조신성대 왕 8 년 경애왕, 소식을 듣고 왕건에게 사신을 보 내,“견훤은 반복(反復)하여 거짓이 많으 므로화친할수없다”며화친을만류.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2년조 高麗史권1세 가1태조8년 ⑩ 925 .10.1 5-92 5.11 견휜 공세 ⑪ 925 .12 견훤, 거창(居昌)등20여성을함락 삼국사기권50 열전10견훤 ⑫ 926 .4.5 甄萱의質子眞虎가고려에서病死. 侍郞 익선을보내어그喪을견훤에게護送 高麗史권1세 가1태조9년 ⑬ 926 .4 甄萱, 고려의 質子 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이끌고熊津에 進軍 高麗史권1세 가1태조9년 ⑭ 926 .4 왕건, 諸城에 命하여 뷺城壁을 굳게 지키 고나와싸우지말라뷻고엄명 高麗史권1세 가1태조9년 ⑮ 926 .4 경애왕, 使臣을 왕건에게 보내어 뷺甄萱 이 盟約을 어기고 擧兵하였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을 것이요, 만약 大王께 서 한 번 戰鼓를 울리는 威勢를 떨치기만 하면甄萱은반드시절로敗北할것이라” 며독전.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3년조 高麗史권1 세 가1태조9년 뛝 926 .4 왕건, 경애왕의 使者에게 뷺내가 甄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요, 惡이 차서 스스 로쓰러질것을기다릴뿐이라뷻고대답.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3년조 휴전 뛞 926 .4 甄萱, 讖書에 뷺絶影島의 名馬가 이르면 百濟가 亡하리라뷻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後悔하고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 줄 것 을請하자, 왕건이웃으며許諾.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高麗史권1세 가1태조9년 왕건 공세 뛟 927.1 왕건親征, 百濟의龍州를쳐서降服 高麗史태조10년 뛠 927.1 경애왕,백제의龍州로出兵해왕건원조 高麗史태조10년 뛡 927 .1.13 甄萱, 王信의 喪을 왕건에게 보내자 왕건이 王信의아우育을보내어이를맞아오게함. 高麗史태조10년 뛢 927 .3.10 왕건, 運州에 들어가 그 城主 兢俊을 城 下에서敗北시킴. 高麗史태조10년 뛣 927 .3.13 왕건, 近品城(慶北 聞慶郡 山北面近品 里)을쳐陷落. 高麗史태조10년 뛤 927 .4 壬戌 왕건, 海軍將軍 英昌과 能式 等을 보내舟 師를이끌고康州를공략,轉伊山老浦平 西山突山等四鄕(다南海郡에있음)을 降服시킴 高麗史태조10년 뛥 927.4 왕건, 熊州를공략했으나不克 高麗史태조10년 뛦 927 .7.10 왕건, 元甫 在忠 金樂 等을 보내어 大良城 (陜川)을 攻破하고 將軍 鄒許祖 等 30여 人을생포함. 高麗史태조10년 뛧 927 .8.8 왕건, 康州 高思曷伊城을徇行하매 城主 興達이歸順하니이에百濟의여러城主 가모두降附. 高麗史태조10년 뛨 927 .8 왕건, 흥달(興達)에게 청주(淸州)의 녹 (祿)을내려주고,그맏아들준달(俊達)에 게는 진주(珍州)의 녹을, 둘째 아들 웅달 (雄達)에게는한수(寒水)의녹을, 셋째 아 들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의 녹을 내려주고, 또전택(田宅)을하사. 高麗史節要 1 권 태조신성대 왕 10년 8 월 견휜 공세 뛩 927 .9 甄萱, 近品城을 공격, 일대 三光, 殄滅을 행함 삼국유사권2 기 이2후백제견훤 뛪 927 .9 견훤, 高思曷伊城 공격을 기하자 城主 興達이불안하여사망 高麗史 권92 열전5흥달 뛫 927 .9 경애왕,왕건에게구원요청 삼국유사권2 기 이2후백제견훤 뛬 왕건, 구원군파병논의중에 견훤이高鬱 府.[今蔚州.]점령 삼국유사권2 기 이2후백제견훤 뛭 927.1 0-? 왕건, 공훤을 主將으로 大相 孫幸, 正朝 聯珠등1만구원군파병 삼국사기 권50 열전10견훤 뛮 견훤, 始林.[一云鷄林西郊]을 거쳐 新羅 王都에 침입 삼국유사권2 기 이2후백제견훤 뛯 927.11 경애왕,포석정에 유행 〃 뛱 견훤, 포석정을 급습, 離宮에 숨어있던 경 애 왕의 從臣, 伶 官,宮 女 등을 모두 학 살하고陷沒. 삼국사기 권50 열전10견훤 뛲 견훤,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간하고 경애왕의족제 김부를왕으로옹립 삼국사기 권50 열전10견훤 뛳 견훤,서라벌왕궁에거하면서보름간체재 삼국유사권3 뛵 왕건,大怒하여使臣을신라에 보내弔祭 高麗史태조10년 뛶 927 .12 甄萱, 乘勝해 大木郡(慶北若木郡)을 攻 取하고田野에 노적한곡식을다불사름. 삼국사기 경순 왕 1년 12월 뛷 928 .8 甄萱이將帥를보내어碧珍郡을침략하고 大木小木二郡의農作物을베어버림. 삼국사기 경순 왕 2년 8 월 뱚역사 비정(2) 뱚Ⅰ. 927년 서라벌 안팎의 정세 뱚Ⅱ.경애왕의치세와후삼국동란 뱚Ⅲ.경애왕이재촉한자신의운명 뱚Ⅳ.견훤의대공세와죽음의그림자 뱚▶다음회에계속 박순교 목 차 Ⅰ.927년서라벌안팎의정세 Ⅱ.경애왕의치세와후삼국동란 Ⅲ.경애왕이재촉한자신의운명 Ⅳ.견훤의대공세와죽음의그림자 Ⅴ.927년서라벌안팎의정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