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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2월28일 화요일 4 (제122호) 특집 재사(齋舍)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 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墓所)나 사묘(祠廟) 옆에 지은 집을 말하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1년에 한 번 이상 자손들이 모여서 제사 지내는곳이라하여재숙소(齋宿所)라고도한다. 서원(書院)은 명현(名賢)을 제사(祭祀)하는 사(祠)와 자 제들을 교육하는 재숙(齋塾,書齋)가 합하여 설립되었으나 주 로 강학(講學)이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세포탈의 목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해 대원군은 집정 초기부터 서원의 비행과 불법을 낱낱이 적발케 하는 동 시에 사설(私設)과 남설을 엄금하라고 지시했으며, 1865년 (고종 2년) 서원의 괴수 격인 만동묘를 철폐케 했다. 1866년 (고종 3년)흥선대원군은 명을 내려,면세와 면천으로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사원을 일제히 정리하였다. 비사액 서원 을 우선적으로 철폐되었으며,1870년에는 사액서원 중에서도 붕당을 만들어 백성을 해치는 일을 조사하여 일부를 철폐하 였으며, 1871년에도 첩설된 서원을 모두 철폐하여 전국에 47 개소만남겼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철폐된 서원이 문중과 사림에 의해 복원되면서현재에이르고있다. 재사와 서원의 관리는 봉안되어 있는 신 주(神主)의 종중에 서관리하고있다. 밀양의 밀성재(密城齋)처럼 청년회와 대종회 간사가 상주 하고 관리인이 매일 청소하며 윤기가 흐르는 곳이 있는 반면 1년에 한두 번 제사(祭祀)에만 문을 열고 청소하는데 그치고 있는곳이대부분이다. 이로 인해 각종 곤충과 조류의 배설물이 쌓이고 목재는 해 충의표적이되어퇴락하는경우가다반사이다.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경우 사람의 체온 즉 기(氣)가 없을 경우 쉽게 퇴락한다는 정설(定說) 때문인지 최근에는 콘크리 트 구조물로 건축을 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관리부재는 마찬 가지인듯하다. 그리고 최근 뿌리 개념이 희박해지고, 삶의 질이 윤택해지 면서 선뜻 관리를 맡으려는 인력 또한 없어 애를 태우는 문중 이허다하다. 전북의 모(某) 문중은 위토답이 수 십 마지기가 있음에도 관리인을 구하지 못해 폐가로 변해가는 재사를 보면서 발만 동동구르는경우도있다. 이는 종중의 대소사를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남의 일보듯하는구성원들의책임감부재도한몫한듯하다. 재사와 서원의 상시 개방, 즉 지역주민과 종중원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관리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경남 진주의 물언재와 경남 창원의 운암서원, 전북 전주의 청하서원의 관 리는 모범사례라 할 수 있 다 . 이 곳 은 매 년 전 국 에서선조유적지탐방코스로많은일가분들이찾기도한다. 밀성박씨 은산부원군의 아들 송은공의 삼남 아당공(諱 調) 의대표재사(齋舍)물언재입구에는자연석으로축조하고정 원수, 유실수, 화초류 등 12,000그루를 식재하여 꽃동산을 조 성하였다. 특히 물언재 정당에는 9개 소문중이 출연하고 일치 단합하 여아당선조이하811위(位)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4월 1일 150여명의 성손들이 통합향사에 참례하여 조상님의 음덕 을 기리고 성손간 친목을 도모하며 장례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선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서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 되고있다. 그리고 후손들이 언제라도 들러 쉴 수 있 도 록 시 설 을 갖 추 어최근한옥체험을하려는도시인들에게인기가높다. 경남창원의운암서원은지역주민과함께한다. 수시로 다도(茶道) 체험 등 지역주민과 함께하려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서원을 개방함으로서 지역주민들은 반기고 있 다. 밀성박씨 송은공의 차남 인당공(휘 소)의 아들 감찰공(휘 맹번)께서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창원 사화에 터를 잡아 수백 년을 창원의 토호성씨로 자리 잡고, 130여호의 큰 집성촌을 이룬 종중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지역주민을 위한 의 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가졌다는 칭송을 받을수있는계기를만든것이다. 전북전주의창하서원은모악산맑은계곡에학동들의또랑 또랑한목소리가울려퍼진다. 방학을 이용한 선비학당을 연 것이다. 서원의 설립 목적인 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함으로서 배향된 선조의 현창사업 을함께하는일거양득을이룬셈이다. 이처럼 재사와 서원의 관리는 내 것을 쉽게 남에게 보여주 거나 주기 싫어하는 관습을 버리고 개방하여 지역주민과 함 께할때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체험공간으로 활용하는 종중도 있다.산 사체험 즉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재사 또는 서원에서 가져볼만하다. 이를 위해서는 취사시설이 가능하도록 펜션화하여 도시 삶 에 찌든 종원들이 언제든 찾아와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의변화가필요하다. 재실을 이용하는 후손들은 일정한 사용료를 지불하고 청소 를스스로할수있는콘도형운영방식을제안하고싶다. 재사(齋舍)와서원(書院)의관 리지금이대로좋은가? 뱚제사와서원의정의 뱚관리및운영실태 저존재-전남나주시남평면 함양박씨동정공재사로서산뜻하게관리되고있어인상적이다. 뱚재 사 의 사 용 방안 에 대 한 제 안 우리 주변에는 선조의 제사를 지내고 종중사를 논의 하기 위해 지은 재사와 지역 사림(士林)의추앙을 받 은 훌륭한 선현을 초모하기 위해 지은 서원이 즐비하 다. 그러나 이들 시설들이 1년에 한두 번 사용에 그치면 서 각종 곤충과 조류의서식지로 전락하여형 용할 수 없을정도의관리부재를엿볼수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재사(齋舍)와 서원(書院)의관리 상태와 향후 운영전망에 대한 방 안을제시해보고자한다. /박상섭 본보편집국장 밀성재전경-경남밀양시내일동 물언재는1942년진주의금선봉아래지어졌다. 1987년 공군교육사령부가 들어서 지금의 금산면 속사리 로 이건하였으나세월이흐름에따라퇴락해져종회 회의에 서 중수를 결정 22개 소문중의 뜨거운 열정과 애정으로 지 어졌다. 물 은 근 원 이 멀 어 야 흐 름 이 멀 리 갈 수 있 고 , 나 무 는 뿌 리 가 깊어야 잎이 무성해진다. 훌륭한 조상이 후손을 위해 많 이 베풀었으니 후손 된 사람들은 마땅히 조상을 받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란 많은 어려움이 있으 나밀성박씨아당공파종회에서는 종원 모두가 합심하여 이 를 극복하여 2008년 2월 15일 착공 2년 만에 물언재는 아담 하면서도장엄한자태를뽐냈다. 대지면적 197평 본관 23평(전면 5칸 측면2칸)소슬대문 6 평(삼문)으로 전통적인 제실 형태를 벗어나 관리와 실용성 이편리하도록지어졌다. 그 리 고 재 실 을 1 년 에 한 번 재 사 에 사 용 하 는 것 을 탈 피 성 손들이 수시로 찾아오는 재실로 만들기 위해우선 재실주변 3000여평 조경에 심혈을 기울여 인근주민들이찾아와쉴 수 공원으로만들었으며,산사를찾아체험활동을하듯성손들 이 선조의 유지가 깃든 재실에서 편히 쉬었다 갈수 있도록 하였다고말했다. 특히, 물연재에는 아당선생을 비롯한 후손 240여 위패를 봉안추모케하였다. 재호는 몰언재(勿言齋)이며 삼문의 문호는 묵연문(默然 門)으로 주련은 아당선생의 자관시의 운자를 따서 걸고 선 생의유훈을되새기게하였다. 재실의 이름을 물언재라 한 것은 아당공(啞堂公)의 아호 인‘아’자의뜻을풀이한것이다. 성인 공자가 제자 안연이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항목 에 대해서 물은 것에 사물로써 답하였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고((非禮勿 聽),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예가 아니면 움지 이지 말아라(非禮勿動)”라는 사물(四勿) 가운데서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렵다.그래서 아당공은 말하지 않는 것(勿 言)으로부터시작했던것이다. 물언재(勿言齋) 물언재(勿言齋)경남진주시금산면속사리 운암서원은 우곡[憂谷, 휘(諱)신윤(身潤)]선생을 배향 하는서원으로학덕이높고 효행이 지극하여 선생께서돌아 가신 5년 후인 1702(肅宗 28)년 향토 사림의 중지(衆志)를 조정에 상소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어 운암사 (雲巖祠)와 불천위(不遷位)로서 별묘(別廟)하여 제사하였 다. 1844년(헌종10)에 서원으로 승격되어 지역민을 교육시 키는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이 고을 인재 양성에 크게 공헌 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 라 이 운암서원은 문을 닫고, 1876년(고종13)에 중건하여 우곡선생의제사만모시게되었다. 후손들이 선대의 영령을 사모하고 선비가 전대의 현인을 흠모하는 마음은 끊임이 없다. 그러나 시설은 퇴락하고 지 붕이 낡아 비가 샐 지경에 이르러, 지역유림과 후손들의 서 원 중수 논의가 계속되어 2001년 구지(舊地)에 서원중수를 위한 착공에 들어가 2004년 역사적인 서원 복원과 동시에 유림의公儀로선대3位를함께봉안하게되었다. 서원은 지대의 특성을 살려 삼단으로 층계를지어 마련하 고 돌과 나무로 조경하였으며, 총11동(棟) 부지 5,900㎡(약 1,785여평)으로 웅장하고도당당하게면모를완비하였다. 가장 위층 사우(祠宇)는 삼칸의 맛배 지붕으로 경현사 (敬賢祠)이다. 수위신좌(首位申坐)는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익(翊), 제2좌(第二座)는 인당선생(忍堂先生) 휘 (諱) 소(昭), 제삼좌(第三座)는 의와(義窩) 휘(諱) 홍정 (弘貞), 제사좌(第四座)는 우곡선생(憂谷 先生) 휘(諱) 신 윤(身潤)을배향하였다. 제이단(第二段)은 오간(五間)의 팔짝지붕으로 강당(講 堂)이며 운암서원(雲巖書院)이라 편액(扁額)하였고 하단 에는 동서재(東西齋)로 권선재(勸善齋)와 근학당(勤學堂) 이다. 입구의 외삼문(外三門)은 정안문(靖案門)이라 하였 다. 운암서원은 복원된 이래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고 향사 를 드리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서원의 본래 기능을 살려 창 원 등 인근의 지역민에게 항시 개방하여 효행(孝行)과 학덕 (學德), 충절(忠節)을 을 전파하고, 차도교실, 요가교실, 청 소년문화교실,토요나눔차회(무료차시음,전통무예체험), 방학을 이용한 청소년 문화교실을 열어 전통 문화공간으로 도 이용 지역사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어 기존의 서 원과제실분위기를탈피주민으로부터호응을받고있다. 이 서원에는 경상남도 문화제 제나10-16378호 우곡문집 목판과 제나10-16380호 박홍정 선생의 선무원종일등공신 녹권을보존하고있다. 운암서원(雲巖書院) 운암서원(雲巖書院)경남창원시사화동303번지 청하서원은 사계 김장생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사계선생 의 문인으로 사계선생의 높은 학덕에 견주어 볼만한 매포 박동립 선생과 그의 아우 청류당 박동현 선생,국난에 창의 한 지 곡 유 조 선 생 , 사 계 선 생 의 문 묘 배 향 을 상 소 한 매 포 선 생의 증손 매산 박대복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어떻게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연대는 수백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에 의해 훼철되고 단을 세워 제향을 올리다 1968년에 복원 되었다. 사계선생은 매포 선생과 청류당 선생을 뷺박( 朴)아무개가 언론(言論)과 풍채(風彩)가 족(足)히 남주(南州, 남쪽고 을)에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뷻고 하였으며, 또한 두 형제 분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道)를 행한 분으로 높 이 추 앙 받 고 있 다 . 청하서원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道)를 행한 분으로일세의사표가된훌륭한성현을배향한곳이다. 그리고 수백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에 의해 더욱 빛이 나 고 있 는 듯 하 다 . 성 현 의 취 할 바 를 몸 소 실 천 하 고 있 기 때 문 이다. 서원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수 없이 배출한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주축을 형성하 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교육기능이쇠퇴해문중의 집결지로인식되고 있는 실정이 다.뱚 그러나 청하서원은 최근까지 ‘온 고을 어린이 선비 한학 체험’을 통해 추구 완전 암송 및 예절교육, 고사성어, 한자 퀴즈,한자 그림일기쓰기등다양한프로그램으로청소년들 의 인성함양에 매진하였으나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학 원으로 선호하면서 참가자들이 떨어져 얼마전 중단되어 종 중 임원진을 비롯한 지역주민들은 서원을 체험공간으로서 지역 학생들의 인성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위해 노심초사 하고있다. 청하서원 청하서원.전북 전주시완산구중인동(모악산입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