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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2월31일 토요일 6 (제120호) 관향조 종친회 진전면은 창원시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진동면, 서쪽은 고성군과 함안군,남쪽은 고성군,북쪽은 진북면과 함안군에 각각 접하고 있어 후손들 또한 진전면 오서리를 중심으로 고 성군회화면과함안등지에분포되어있다. 국도 14호선 창원에서 고성방면으로 고성터널을 사이에 두고 진전면과 고성군 회화면 사이에 있는 오서리는 진전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로 후손들의 입향은 고성군 회화면 치명 마을에서임진왜란이후에입향한것으로전해진다. 정언공의 휘는 삼양(三陽)으로 충숙왕 원년 급제하여 벼 슬이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이 르고 밀성군에 봉작된 휘 윤문(允文)의 아들 6형제(6양) 중 넷째아들로 고려 때 문과 정언(正言)에 올랐다.정언공의 아 들 사한(思漢)은 고려조 상장군으로 밀양에서 대구 달성군 구지로 이거하였고,그의 손자 중호(重豪)는 문과에 올라 정 언, 응교를 역임하고 아들 협(浹), 감(減)을 두었는데 이중 장남 협(浹)의 후손들은 구지에,차남 감(減)의 후손들은 주 로고성군하이면월항리에세거지를두고있다. 감찰을 지낸 협(浹)은 아들 성우(聖遇)와 성시(聖時) 형 제를 두었는데 차남 성시의 후손들이 고성군 회화면을 걸쳐 진전면오서리에거주하게된다. 고성군 회화면 치명마을 입향은 참봉을 지낸 휘 성시(聖 時)의 차남 말신(末新)으로 연산군 때 형(휘 一新. 이조판 서)이 형수와 함께 화를 당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치명마을 로은둔하면서시작되었다. 이후 말신(末新)의 아들 문현(文顯)은 학행이 뛰어나 참 봉으로 천거되었으며, 손자 량(亮)은 음직으로 어모장군(禦 侮將軍) 부사과(副司果), 증손 연홍(連弘)의 호(號)는 신암 (新菴)으로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병조판서에 증직되 었으며, 아들 삼형제 성립(誠立), 유립(有立), 준립(俊立)을 두었는데 장남 성립의 아들 중수(中粹)의 부인 분성허씨가 아이들의 훈육과 넓은 농토를 찾아 이웃마을인 진전면 오서 리로 이거하고 차남 유립(有立)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지면 서자연스레큰세거지를이루게되었다. 밀성박씨 충헌공 후 정언공파 병조 판서공(휘 연홍)의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선 조 병조판서공이 임진왜란에 창의하 여 많 은 공 적 을 남 기고, 또 후손들이 우리나라 국가고시 (기술, 행정, 외무, 사법)에 빠짐없이 합격자를 내면서부 터라짐작된다. 병조판서공의 휘 는 연홍(連弘). 字 는 이서(以瑞)이 다. 부사과를 지낸 휘 량(亮)과 증 (贈) 정부인 순천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가정(嘉靖) 병진(丙辰,1556년) 8월 2 8일에 태어났다. 꿈에 天馬가 뜰에 내림을 보고 갑자기 잉태 (孕胎)하여 태어난 공(公)은 풍채(風采)가 준수(俊秀)하고 기상(氣像)이 범인(凡人)과 다르므로 양친(兩親)께서 특별 히사랑하였다. 아이 때 소무전(蘇武傳)을 읽다가 눈(雪)을 씹으면서도 절개(節介)를 변(變)치 않았던 구절(句節)에 이르러 칭탄 (稱歎)하기를 이쯤 되어야 만 가(可)히 하늘을 이고 땅을 밟 을수있다고하였다. 장성함에 담략(膽略)이 뛰어나더니임진란을당하자왜적 이 동구(洞口)에 들어오니 공(公)이 용감하게 뛰어나가 출 전하여무찌르니적이혼비백산하여흩어졌다. 공(公)이 이에 그 아우 연형(連亨)에게 이르되 우리는 세 록지가(世祿之家)라평민과는다르므로내비록백도(白徒) 일지언정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니 너는 가 솔(家率)을 거느리고 산(山)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문득 일 준마(一駿馬)가 안장(鞍裝)에 일장검(一長劍)을 걸고 날아 와있었다. 공(公)이 곧 말을 채찍질하여 칼을 들고 나서니 대중(大 衆)들이 이는 신조(神助)라 하여 의부(依附)하는 자가 날로 더욱많아졌다. 이에 소계(蘇溪)최강(崔堈)과 더불어 현관(縣官)에 달려 가 군 병 (軍 兵 ) 을 더 청 (請 )하 니 현 관 이 그 충 의 ( 忠 義 )를 여 허(與許)하여아울러군기(軍器)까지주었다. 공(公)은 이에 부오(部俉)를 정돈(整頓)하고 영책(營柵) 을 세워 사천(泗川) 창율(倉栗)을 거점으로 공방(攻防)의 계책(計策)을삼았다. 하루는 적병(賊兵)이 갑자기 닥쳐와 그 추장 마성자(酋長 馬性者)가 용맹(勇猛)을 믿고 앞으로 쳐들어오매 처음부터 공(公)과 최강(崔堈),이달(李達),최흘(崔屹),최대관(崔大 觀), 정곽정(鄭廓), 정준(丁俊), 정유경(鄭惟敬), 최각호(崔 角虎), 최용호(崔龍虎) 等은 고성 장사라 일컬어 다 같이 동 심협모(同心協謨)하였고, 또 가현령 조응도(假縣令 趙凝 道)와 성세(聲勢)를 같이 함을 힘입어 고성(固城), 진해(鎭 海), 곤양(昆陽), 사천(泗川) 사이에선 약간의 안정을 얻었 더니 10월에 적이 진양에 들어오자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제 의장(諸義將)을 독려(督勵)하여 전투가 벌여졌을 때 公이 조응도, 최강 과 더불어 군병을 거느리고 남강에 이르니 적 들이원병(援兵)이크게온것을의심하여도망쳐갔다. 계사(癸巳,1593년)에 적이 다시 대거(大擧) 진양성을 애 워싸서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에 앞서 공(公)의 족형(族兄) 판관(判官)승남(承男)과 같이 창의하여 공이 군마(軍馬)를 나누어 진양에 보내어 같이 만나 싸우게 될 때 공의 몸에 적 탄(敵彈)이세번이나맞았다. 그 후 충익공(忠翼公) 곽망우당(郭忘憂堂)과 함께 승진 (昇津)에서 힘을 합하여 싸울 적에 닥치는 곳에 감히 앞 설 자가 없었으니 곽공이 가로되 충용(忠勇)은 박모(朴某)에 당할 자 없다하니 조정(朝廷)에서 듣고 특히 훈련원첨정을 제(除)하였다. 공(公)이 신천정사(新川精舍)에 퇴거하여 자호(自號)를 신암(新菴)이라 하고 평생에 의병을 일으킨 그때의 일을 자 기 입으로 말한바 없다고 하였다. 정유(丁酉, 1597년)에 적 이 다시 쳐들어오니 공(公)이 또 향병(鄕兵)으로서 고성 배 둔산성(背屯山城)의 적을 물리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 判決事)에 승진(陞進)되고 선무원종공3등(宣武原從功三 等)에기록되었다. 그 후 또 적을 쫓아 마포(馬浦)에 이르러 홀연(忽然) 대중 군(大衆軍)에 부딪쳐 적으로부터 투항(投降)을 권유(勸誘) 받고도 이에 불응하고 용전분투(勇戰奮鬪)하다 중과부적 (衆寡不敵)으로 드디어 불굴양사(不屈兩死)하여 이 소식을 들은 부인 평강채씨 또한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순사(殉死) 하니 초혼(招魂)과 의리(衣履)로 회현동 치명산 임좌에 안 장되었다. 당시 적산전투에 공(公) 남긴 격석시(擊石詩) 한 편이당시의상황을말해주는듯하다. 뷺江山異兮 擧目凄其(강산이혜 거목처기) 강산이 달라졌 네 눈 떠보니 그 처참함이여. 嗚呼哀哉 此何天(오호애제 차 하천)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 하늘이 어찌하여일까 日暮道遠 世事悲音(일모도원 세사비음) 날은 저물어 갈 길은 먼데 세 상사슬픈소리뿐이네뷻 공은후에자헌대부병조판서에추증됐다. 그리고 현세(現世)에 이르러 그의 후손들은 기술, 사법, 행정,외무,의사 고시 등 우리나라 국가고시에 빠짐없이 합 격자를 배출하여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뿐 만 아 니 라 교 육 , 행 정 , 경 찰 직 등 많 은 후 손 들 이 종 중 을 빛 내고 있어 정언공파 병조판서공 진전문중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충헌공后정언공파병조판서공문중 <경남창원시마산합포구진전면오서리> 뱚 집성촌 탐방 화수당(花樹堂)과 시비(詩碑)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병조판서공이 적산(積山) 전투 에서읊은시격석시(擊石詩)를돌에새겨기리고있다. 구천정사(龜川精舍)- 오서리760번지 임란의병장증자헌대부 병조판서공(휘 연홍)의공적을기리기위해18 64년지방유림들과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재실 크기는 7칸의 큰 규모이면서 보기드문 팔작지붕으로 찬건된 구천 정사는정면에익랑채겸대문이 있으며경내에장군의신도비를비롯 신 암공의후손처사영환과 연환의비도서있다. 장군의 향사 뿐 아니라 지방 유림들의 교육, 일제치하에서는 수만은 애 국지사가 이곳에서 4·3 삼진의거를 모의하였고, 3·1 독립운동을 태동 한 장소이자또진전중학교가도립으로 승격되기전까지고등공민학교 로서이 고장의교육의산실로서많은인재를양성배출했다. 신암공묘소-고성군회화면치명마을 신암공전적비각-고성군회화면월계마을앞 비각에는전적비와전투에서방패삼았던돌(右)이 함께 있다. 주수중중회장과 호근前충헌공대종회감사 가 문중의 내역과 신암공의 묘소를 안내해 주고있다. 밀성대군의 위패를 최초로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등 밀성대군 후예의 상징 적인 곳으로 밀성대군을 비롯한 21현조 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원덕사가 박중 흠 전 회장 타계이후 후임회장 추대에 애 를 먹고 있으면서 삼문지붕 보수 등 산적 한현안을해결하는데애를먹고있다. 지난 달 29일 개최된 임시총회는 이 같 은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각 종파 회장단 을 비롯한 임원진 40여명이 참석한 가운 데 열띤 토론이 이어졌으나 이렇다 할 해 결책을 내놓지 못한 가운데 회비를 납부 하는 이사 제 운영과 고(故) 중흠회장 공 적비 건립 안을 상정하여 원안대로 처리 하고, 후임 회장 선임 건은 추후 논의를 거쳐 3월(음) 추향이사회에서 다시 논의 키로하였다. 회의에 앞서 노영 회장은 중흠 회장 타 계이후 수석부회장으로 그 자리를 대신 하고 있으나 모든 것이 부족한 몸으로 어 찌 할 바 를 모 르 고 시 간 만 보 낸 것 같 다 고 말하고 훌륭한 분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원덕사가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고 말 하고,각종중의훌륭한분을 이사로 추대 하여 운영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 다. 고(故) 중흠 회장은 재임 중 원덕사를 향토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 사우(祠 宇)와 삼문, 관리사 등을 정비하고, 수도 시설을 설치 등 많은 일들을 해 와, 그 만 큼 빈자리 또한 커 고인을 추모하고 기리 기 위해 공적비 건립을 추진하고 세부적 인 내용은 집행부에서 다시 논의키로 하 였다. 한편 이날 임시총회에서 모든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며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 는 정 화 부 회 장 은 사 실 모 든 일 이 힘 이 든 다며 그동안의 소회를 피력하고, 모두가 내 일이다 생각하여 주었으면 한다며 협 조를 당부하였으며, 본보 박상섭 국장은 고(故)귀흠,중흠,성형 회장의 자제들과 젊은 청년들이 원덕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며 고인들 의별사추진을건의했다. 원덕사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3길 88-35번지에 소재한다. 1922년(壬戌) 창건되어 같은 해 동짓 날에 밀성대군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 923년(癸亥) 6월5일 에 8도의 후손들이 대군의 후예인 19중조를 배향했다. 49년 후인 1972년(壬子)11월 7일에 1위를 추 배하고(판서 초암공 휘 麟祐) 또 12년 후 인 1984년(甲子) 11월 동지 일에 1위를 추배(정랑공 휘 粹)하여 원덕사라 편액 을 걸었으며 매년 3월1일 합제를 지내고 있다. 위판(位版)은 신라왕자 밀성대군 휘 언 침(新羅王子 密城大君 諱 彦 )주벽으 로 하고 동벽(東壁:동무,11位)에 밀성부 원군 태사공 휘 언부 (密城府院君 太師公 諱 彦孚). 좌복야공 휘 언인(左僕射公 諱 彦仁). 판도판각공 휘 천익(版圖版閣公 諱 天翊). 사문진사공 휘 원(四門進士公 諱 元). 사헌부규정 공 휘 현(司憲府 糾正 公 諱 鉉).영동정공 휘 원광(令同正公 諱 元光). 전법판서공 휘 인우(典法判書公 諱 麟祐). 대제학공 휘 시용(大提學公 諱 時庸). 구산군 휘 천(龜山君 諱 횡). 이조 정 랑 공 휘 수 (吏 曹 正 郞 公 諱 粹 ) . 수 사 공 휘 근(水使公 諱 瑾), 서벽(西壁: 서무, 10 位)에 도평의사공 휘 언상(都平議事公 諱 彦祥). 밀직부사공 휘 양언(密直副使 公 諱 良彦). 삼사좌윤공 휘 을재(三司左 尹公 諱 乙在).밀성군 충헌공 휘 척(密城 君 忠憲公 諱 陟).밀직부원군 휘 중미(密 直府院君 諱 中美). 태안군 양정공 휘 원 의(泰安君 惠文公 諱 元義).정국군 휘 위 (靖國君 諱 쭈). 창원군 혜문공 휘 령(昌 原君 襄靖公 諱齡). 군수공 휘 치온(郡守 公 諱致溫). 부호군공 휘 태익(副護軍公 諱泰益)등 22현을 배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유인당과 추원재가 있으며 헌성비(박성형, 박귀흠)가 있다. 여러 차 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0 09년 12월 옥천군 향토유적 2009-1호로 지정되었다. 박중흠회장타계후삼문지붕 보수등 산적한현안해결못해후임회장추대급선무 원덕사 임시총회 가져 고려가 망하자 삼부자 모두가 함께 이 조개국에 참여 하지 않는 절의정신을 보 여준 행산공(휘 세균)과 아들 도은공(휘 문빈),소감공(휘 문익)의 삼부자 추모제 향이 지난 달1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 대리 행산재 후원(後園)에 모셔진 단소 에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병승(炳昇, 아달라왕 참 봉) 집례의 창홀에 따라 각 단소에 정해 진 제관의 헌작으로 40여분에 걸쳐 엄숙 봉되었다. ▶헌관명단참조 행산재는 1955년 3월 종중원로 봉희 (鳳熙) 현종의 수창(首唱)으로 전 종원 들의 성금으로 행산공을 비롯한 삼부자 단비(壇碑) 건립과 재사(齋舍) 정당(正 堂) 4칸으로 창건하여 행산재(杏山齋)라 편액을 달았다. 이후 1964년 종회에서 재 사가 협애(狹隘)함을 절감(切感)하고 전 종원의 성금으로 정당 5칸, 동재 4칸, 대 문 3칸으로 확장 중건하여 동재를 효우당 (孝友堂), 대문을 동원문(同源門)이라 하였으며, 1983년 서재 4칸을 증축하여 치각실(致慤室)이라편액을달았다. 지금의 단소는 1984년 구제단비(舊祭 壇碑)가 왜소(矮小)하고 협애(狹隘)하 여 개수(改竪) 확장하였고, 정당은 2011 년확장중수하였다. 행산공(杏山公)은 서기 1340년경에 고 려 충혜왕 때 양효공(良孝公) 간(幹)의 차차(次子)로서 은산부원군 휘 영균의 제(弟)로 태어나고, 휘(諱)는 세균(世 均)으로 중조 태사공(太師公)의 6세손이 며 벼슬이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 학사(翰林學士)를지내셨다. 원나라 구양현은 선생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詩) “송고려 박학사”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귀국하여 벼술이 평장사 (平章事)에 이르고, 밀성부원군(密城府 院君)에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 靖)이라 별세 후에 받아 당대의 거유(巨 儒)임을알 수 있다. 아들 도은공(挑隱公, 휘 文彬)과 소감 공(少監公, 휘 文翊) 형제가 포은(정몽 주), 목은(이색)등의 문인들과 교류하였 으며 목은 先生의 시중(市中)에도 있듯 이 부자(父子) 세분이 학문이 깊었기에 가전삼학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 절이있다. 한 편 전 날 밤 헌 관 및 집 사 분 정 을 위 해 개최된 개좌에서 중희 대종회장은 전일 입재하여 참석한 종원 모두에게 감사드 린다고 말하고 다음날 아침일찍 봉행되 는 제향에 엄숙한 자세로 선조님의 음덕 을 기려 주실 것을 당부하였으며, 이날제 관은 다음과 같다.(행산공/문절공/ 도은 공 順 ) △ 초헌관 규석(規錫), 대규(大奎), 권 필(權必). △아헌관 재화(在華), 충석(忠 錫), 철균(哲均) △종헌관 연희(連熙), 윤규(崙奎), 영실(英實). △축관 무흠(武 欽),을수(乙銖),병찬(炳燦). 고려가망하자이조개국에참여하지않는 절의정신을보여준행산공삼부자절의정신기려 삼부자단소의제관이함께하고있다.(사진왼쪽부터규석,재화,연희,무흠,대규,충석,윤규,을수,권필,철균,영실,병찬,병승, 돌희) 행산재추향봉행 행산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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