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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2월31일 토요일 4 (제120호) 관향조 종친회 초암공 후손들은 조선 초 고난의 시기를 보낸 것으로 엿보인다. 우선 초암공이 불사이군의 충 절을 보이면서 고려 절 신(節臣)으로 명성을 얻 은데 이어 장남 영실(英 實)또한 여러 번 이조판 서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초암공은 슬하에 형제 를 두 었 다 . 장 남 영 실 (英 實)은 사문진사(四門進 士)로 학문이 뛰어나 이 조판서를 증직 받아 진 사공(進士公)으로 불리 며,차남 종실(從實)은 이조좌랑으로 좌랑공(佐郞公)이라 하여 후손들은진사공계와좌랑공계로세계를잇고있다. 초암공의 장남 영실(英實)의 아들 제(悌)는 예조참판, 손자 장손(長孫)의 호(號)는 신재(愼齋) 훈련원첨정 지경연춘추관 사(訓練院僉正 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고 아들 5형제를 두 면서크게번창한다. 장남 자원(滋元)은 진사(進士)이다. 이들 후손들은 경기도 이천으로이주하면서이천파라하여세계를이룬다. 차남 자형(滋亨)은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한우(旱雨)는 성균진사, 차남 한주(旱 펄)의 호 (號)는 수암(守菴)으로 천품이 뛰어나고 효우가 매우 지극하였 다.특히학문이뛰어났고뜻과몸을받들어지성껏부모를봉양 하니 명망이 조야(朝野)에 으뜸으로 문과에 올라 가의대부 병 조참판겸의금부지사에 올라 아버지의 증직에 기여하였고, 만 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학풍을 일으켰다. 그 의 아들 몽현(夢賢)은 어릴 때부터 천성이 특이해서 지극한 효 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학문에 뜻을 두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항상 덕행으로 사람을 교훈하였다.아버지에 이어 문 과에 올라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을 지내 후손들은 예참공파라 하고 각 지역 세거지를 따 산정 (山井), 오가(吾可), 삽교(揷橋), 상지동(商芝洞) 문중으로 나 누어진다. 휘(諱) 한주(旱 펄) 공(公)의 차남 몽량(夢良)은 손자 문영 (文英)에 이르러 족보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보(漏譜) 인지 절손인지 알수 없고,삼남 몽필(夢弼)은 어릴 때부터 단정 하고 침묵했으며,근검과 충효로 마음을 잡아 독서를 게을리 하 지 아니하더니 명종조 때 벼슬에 올라 승문원 정자에서 박사에 승급했고, 이·병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에 오르고, 공조 참의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이후 차남 성춘(成春)의 공훈(功勳)에 힘입어 1677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 며,후손들은 공(公)의 관직을 따 공참공파 곡천문중,도당곡문 중,오지곡문중,석물치문중으로각각세계를이룬다. 휘(諱) 한주(旱 펄) 공(公)의 삼남 몽좌(夢佐)는 증(贈)병판 (兵判)으로휘(諱)자를따몽좌계로물린다. 신재공(愼齋公, 초암공의 장남 영실의 손자)의 삼남 자의(滋 義)는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아들 전(銓)은 증(贈) 가선대부 예 조참판으로 아들 형제를 두었다. 장남 몽규(夢奎)는 통례원 좌 통례를 역임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통례원파(通禮院派), 차남 몽벽(夢壁)은 통덕랑으로 수직(壽職, 101歲)으로 贈 가선대부 호조판서 동지의금부사에 가자되고 호 판공파(戶判公派)로 각 각 분파되었다. 신재공의 사남 자경(滋卿)은 호(號)가 충경(忠 卿)으로 진사이고 그의 아들 영손(永孫)은 선전관, 내금위장, 동중추부동지사를 지내고 강원 삼척으로 이주하면서 후손들은 진사공계삼척문중으로세계를잇는다. 이천계 문중은 초암공의 장자 영실(榮實)의 손자 신재공(愼 齋公, 휘 장손)의 장남 휘 자원(滋元)을 기일세조로 한다. 공 (公)은 진사(進士), 아들 은정(殷鼎)은 음(陰) 직장(直長), 손 자 수일(守一)은 행(行) 군자감직장, 증손 인문(仁文)은 음 (陰)장악원첨정으로후손들은경기도이천에주로거주한다. 산정문중의 입향조는 언근(焉根)으로 예참공 휘 몽현의 증손 으로 조부 의춘(宜春)은 문필이 뛰어나 문과에 올라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아버지는 승정원 주서를 지낸 휘 원룡(元龍)으로 공(公)은 차남으로 자(字)는 무백(武伯)이다. 1612년(壬子, 광해4)에 태어나 선대의 음덕으 로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의 직첩을 받았고, 후에 두 손자(필 제,정제)의귀(貴)함을힘입어호조참의에추증되었다. 아들 상륜(相綸)은 약관시절부터 희롱을 좋아하지 아니했으 며,독서에힘써겉과속이항상단정하였다.일찍이권문재리의 가문을 출입하지 않았고,사리에 어긋난 말을 말하지 않았으며, 집에 있을 때는 효제를 근본으로 삼아 그 인품을 칭송하는 자가 많았다.아들필제,정제의귀(貴)로호조참의에추증되었다. 손자 홍제(弘濟), 명제(命濟), 필제(弼濟), 정제(廷濟) 등 넷 을 두었는데 이중 필제의 자(字)는 극보(極甫)인데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정제는 가선대부 중추부 동지사를 역임 아버 지와조부의증직을받는등가문을빛냈다. 주요세거지는충남아산시도고면금산리에거주한다. 오가문중은 예참공 손자 흥룡(興龍)을 기일세(起一世)하고, 아들 창근(昌根), 서근(瑞根) 계근(桂根) 3형제를 두었는데 차 남 서근(瑞根)은 숙부 운룡(雲龍)에게 출계하고 창근은 현손 종열(宗烈)에 이르러 아들 정진, 치진, 익진, 승진 등 4형제, 계 근의현손한두(漢斗)는승진,위진,의진예진을두었는데이중 의진과예진은무후이고주로충남예산군오가면에산재한다. 삼교문중은 예참공의 아들 의춘의 삼남 운룡(雲龍)을 입향시 조로 삼는다.그러나 운룡(雲龍)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중형(仲 兄) 흥룡(興龍)의 차남 서근(瑞根)을 입적(入籍)하여 세계를 잇는다.그러나 서근((瑞根)또한 후사가 없어 종질(從姪)만성 (萬成,생부檜根)으로하여금세계를이었으며,주로예산군삽 교읍에세거하고있다. 상지동 문중의 입향선조는 예참공의 아들 의춘의 넷째아들 승권(承權)으로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정4품)를 역임하였 다. 아들 회근(檜根)과 유근(楡根)을 두었는데 차남 유근은 충 의위(忠義衛)병절교위(秉節校尉,종6품)을 지냈다. 후손들은예산읍간양리상지마을에세거지를두고있다. 공참공곡천문은명종조때승문원정자에서박사에승급했고, 이·병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에 오르고, 공조참의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이 된 후 차남 성춘(成春)의 공훈(功勳)에 힘입어 1677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된 휘 몽필(夢弼)의 장남 우춘 (遇春)의 손 자 후 영 (厚 榮)을 기 일 세 한 다 . 휘 후 영 ((厚榮)의 조 부우춘(遇春)은정략장군(定略將軍)行의흥위(義興衛)부호군 (副護軍)이고, 아버지 정립(挺立)은 통훈대부 행(行) 통례원좌 통례로 아들 후영,후성,후현,후청 등 4형제를 두었으며 이중 장 남은 곡천문중 차남은 도당곡, 삼남은 오지곡 문중이다. 오지곡 문중의 입향선조 휘 후영의 아들 세규(世規)는 효력부위(效力副 尉)이고,후손들은간양리곡천마을에세거한다. 공참공 도당곡문중은 통례원좌통례를 역임한 휘 정립(挺立) 의 차남으로 휘(諱)는 후성(厚盛), 자(字)는 경성(景成)으로 1 619년(광해11)에 태어났다. 1639년(인조17)에 기묘과에 합격 한 성균진사이다.아들 세창(世昌), 세장(世章)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여간양리도당곡에집성촌을이룬다. 공참공 오직곡 문중은 도당곡문중의 휘 후성(厚盛)의 동생으 로 휘는 후현(厚顯)으로 1628년(인조6)에 태어나 수직(壽職) 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에 가좌되었으며, 9세손 장규(莊圭)는 교 정직이사관으로평생을교도행정발전에공헌하여녹조근정훈 장을 수상하였다. 특히 6.25직후 포격으로 쓰러져가는 충북 옥 천 원덕사를 사재 수백만원을 출연하여 확장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게 하였다.당시 우선 먹고 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수백만원 의거액은누구도감당할수없는큰금액으로공의숭조심이먼 후세에까지기리전해지길기대해본다. 후손들은간양리오지곡마을에거주한다. 공참공 석물치 문중은 공조참판에 추증된 휘 몽필(夢弼)의 차남성춘(成春)으로기일세하고있다. 휘 성춘(成春)은 선조 때 무과에 올라 선전관, 훈련원첨정으 로 임진왜란에 어가를 호종하여 선조37년 선무원종공신 1등으 로 녹훈되고 1620년(광해12) 어해장군 훈련원정, 통정대부 형 조참의에오르고아버지와조부의증직이내려졌다. 아들 정민은 통정대부,차남 정준은 당시에 비석을 세우고 그 행적을 기록하였으나 비석이 사라져 알 수 없다.석물치는 간양 리의자연부락으로마을이름을따문중을구분하다. 몽좌계 문중은 수암공(휘 한주)의 사남 몽좌(夢佐)의 휘(諱) 를 따 인용하였으며, 휘 몽좌(夢佐)는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아 들삼형제를두었다. 장남 경춘(景春)은 무과에 올라 판관(判官), 차남 찬선(纘 先)은 재종숙부 휘 전(銓)에게 출계하였고, 삼남 대춘(帶春)은 부호군으로후손들은예산읍궁평리에주로거주한다. 통례공계 문중은 신재공(愼齋公, 휘 長孫)의 삼남 자의(滋 義)의 아들 전(銓)의 장남으로 통례원 좌통례를 역임한 몽규 (夢奎)를 기일세로 한다. 아버지 휘 전(銓)은 증 가선대부 예조 참판이고 동생 몽벽(夢壁)은 호판공계로 불리며, 주로 아산시 도고면석당리에세거한다. 호판공계는 통례공 휘 몽규(夢奎)의 동생으로 휘(諱)는 몽벽 (夢壁)으로 통덕랑을 역임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 판서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심춘(尋春)은 통덕 랑, 손자 계문(季文)은 주부(主簿)이며 집성촌은 당진시 합덕 읍석우리이다. 삼척문중의 입향조는 신재공(휘 장손)의 다섯째 휘 자경(滋 卿)으로 공(公)은 1598년(선조31)에 태어나 26세에 문과에 올 라 선전관(宣傳官), 내금위장, 동지중추부동지사를 지내고 만 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직하고 산수를 즐기며 강원 삼척으 로이주해후손들은진사공계삼척문중이라한다. 좌랑공 신동문중은 초암공의 차남 종실(從實)이 이조좌랑을 역임하였기에 좌랑공이라 한다. 그의 아들 안건(安乾)은 여절 교위(勵節校尉) 충아부사과(忠阿副司果), 손자 흥종(興宗)은 어해장군 행 상호군으로 후손들은 충남 아산시 선장면 신동리 에 세거지를 두고 있어 좌랑공계 신동문중이라 한다. 어해장군 행 상호군을 역임한 흥종의 7대손 시무(時茂)는 어려서부터 지 극한효성으로부모를섬겨 모든 사람들이 박효동(朴孝童)이라 불렸다. 아버지께서 물고기를 즐기시므로 아침에는 그물을 메 고 나아가고, 저녁에는 죽순을 따서 추우나 더우나 비·가와도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고 밥상에 올려드리는 것을 게을지 하지 않았다.부인해주오씨또한효성이지극할뿐아니라남편공대 에도조금도어김이없었으므로부부가합심협력하여밤낮으로 부모봉양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60세가 넘어 병환이 잦아지자 부부가 대변의 맛을 보아가며 시탕과 간호에 힘을 다 하였고,위급해지자 왼손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잘라 주혈하여 수 일간 연명시켰고, 어머니가 위중할 때는 왼손가락이 없었으므 로 칼을 쥘수 없어 오른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드리어 소 생시키기도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여묘살이 삼년간 종신 토록부모를추모하는등출천지효를다하는효자로유명하다. 초암공은 고려 말 예산군 덕방산 아래 초막을 치고 살며 의리 를 지켰다.덕방산은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의 뒷산으로 후 손들은 예산읍 궁평리와 간양리에 큰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후 상지동, 곡천, 도당곡, 오지곡, 석물치 등 자연부락을 이루며 세 거하게 되었으며, 충남 아산시 도고면 효자리, 도고면 석당리, 아산시 선장면 신동리, 예산군 삼교읍,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강원태백시상사미동등에주요세거지를이루고있다. 밀성(밀양)박씨전법판서초암공파 뱚뱚파조별약사 뱚초암공파世系 초암공의 불사이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사이군비(예산읍 간양리 창절사 앞, 뒷면우측 사진뒷면) 뱚 ▶이천계(利川系)문중 창절사(예산읍간양리) 초암공을 비롯한 아들 영실, 손자 제, 증손 장손, 현손 자형, 5대손 한우, 한 주등7位의위패를봉안한 곳으로 초암공파대표재사이다. 뱚▶예참공파산정(山井)문중 뱚▶예참공파오가(吾可)문중 뱚▶예참공파삽교(揷橋)문중 뱚▶공참공곡천(谷川)문중 뱚▶공참공도당곡(工參公道堂 谷)문중 뱚▶공참공오지곡(工參公五枝谷)문중 뱚▶공참공석물치(工參公石物峙) 뱚▶몽좌계(夢佐系)문중 뱚▶통례공계(通禮公系)문중 뱚▶호판공계(戶判公系)재오지(在五池)문중 뱚▶진사공계삼척문중 뱚▶좌랑공신동(佐郞公薪洞)문중 뱚집성촌 뱚▶예참공파상지동(商芝洞)문중 초암공파의시원(始原)은 밀성박씨 12중조의한분이신 삼 사좌윤공(휘을재)의7世후손으로휘는인우(麟祐),자(字) 는경유(景裕),호(號)는초암(草菴)으로부터이다. 파조초암공은고려39대충목왕때사마(司馬)양시(兩試) 에 합격하였고,문무의재주가 특별하여고려 말에 양광도 (楊廣道, 경기도지역) 병마절제사 봉익대부 전법판서 등 에 올랐다. 그러나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에 이를 보 고직언을아끼지않았으나듣지않아스스로물러나은거 하였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치열하여 조야가 황급하게 조정에서 논의하기를 박인우가 아니면 능히 섬멸할 수 없다고 함으 로 공양왕 원년(1390년)10월 다시 일어나 양광 좌우도 수 군도만호가되어공을세웠고,공양왕4년임신(壬申,139 2)7월 16일조선이 개국하매 망복(罔僕,이조의臣民이 되 지 않음)을 맹세하고 물러나 충청도 예산 덕방산 아래초 막을치고살며의리를지켰다. 태조이성계가잠룡(潛龍)의옛친구이기때문에병조판서 로불렀으나나가지않고연세번씩이나초청했으나응하 지아니하였다. 그리고 자손까지도 경계하여과거에 따르지 않게 하며 북 쪽을 향해 가부좌하지도 말라시며 신하노릇을 하지 않은 의리를보였다. 초암공묘소(충남예산군예산읍신예원리산15번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