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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2월31일 토요일 12 (제120호) 기획 사 람 의 도 리 는 인 의 보 다 더 큰 것 이 없 고 , 인 의 의 행 위 는 충 효 보 다 앞 서 는 것 이 없 다 . 이 것 은 하 늘 의 경 륜 이 고 땅 의 의리이며인간사의법칙이다.본시그본성은 처음에는후박(厚薄)이없고,때나세태에따라서도차이가없으며,또한고금(古今)이없었다.대저천명의진 리란기품이나물욕에따라옮겨지거나박탈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그것은확실하다.그러나 후세에사람들을 보면이러한이치를진실로답습하려는것 이너무 허황해서그 참뜻에부합되는 일이드물다 이어찌소위후박이없고고금이없다는것이겠는가?아니다어떠한괴리가있어사태가이에이르렀는가? 마침내‘죽산박씨오충전’을얻어읽어본연후에야 나는무릎을치며부러워하고칭송하면서천리(天理)라는것을사람에게있는것이지때나세태에따르는것이 아니고,민몰(泯沒)되거나후박의이론으로용납 되는것이아님을희미하게나마까달았다.그리고이와같은것은그것을알려고노력하는것을모르는것인지 ,노력하지않은것인지어떤가를특별히얻었다. <1899년안동후인김병창의‘죽산박씨오충전’의서문에서옮김> 조선시대사대부의가문이나현재를살아가는우리집안은충(忠)과열(烈),즉의리를가장중시한다.그런의 미에서죽산박씨가문의칠충렬(七忠烈)은후손들 에게시사한바커지금도회자되고있다.지난해죽산박씨대종회는박한수(朴漢琇)현종이자료를모은‘죽 산박씨칠충열(竹山朴氏七忠烈)’을펴낸바있다.이 는 1899년 ‘죽산박씨오충전(竹山朴氏五忠傳)’을 국역으로 번역하고여기에 귀주대첩의 영웅 박서장군과 임진 의병장 휘 춘영(春榮)의 순국사를 합해 기록한 것 이다.이에본보에서는칠충열전(傳)과부록으로수록한효열부전(傳에대해2회에나누어옮겨보고자한다. 1.박서장군(朴犀將軍)의충절전(忠節傳) 공의 휘는 서(犀)요 자는 양종(洋宗)이 며 호 는 죽 계 (竹溪 )로 죽 주 (竹 州-후 일 죽 산으로개호함)를본향으로하시고문하시 평장사 철성백(門下侍平章事鐵城伯)이시 다. 공은 경천위지(經天緯地)하는 재주가 뛰어나신 형(文衡)으로 출장입상(出將入 相)하셨다. 공은 중시조이신 여조(麗朝) 태조조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 시 충 정공(三韓壁上功臣 太保 三重大匡 諡忠貞 公)의 10세손으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시 충질공(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諡忠質公)휘 정유(挺 찮)는증조고이시고, 지문하성사 좌복시(知門下省事左僕寺) 휘 육화(育和)는 조고이시며, 고 휘 인석 (仁碩)은 호부상서(戶部尙書)이시다. <이 상은족보에서발췌수록함> 공은 고려 고종(高宗) 18년(서기1231 년, 신묘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 使)가 되시어 장군으로서 무관의 직무를 맡게 되셨다. 그때 몽고군의 원수(元帥) 철예탑(撤禮塔)이 철주(鐵州)를 도륙하 고 나서 귀주(龜州)에 이르니 박 서장군 은 장군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과 정주(靜州)삭주(朔州) 위주(渭州) 및 태주(泰州)의 수령(守令)들과 더불어 병 사들을 이끌고 귀주에서 모였다. 그리고 박 서 장군은 김중온군에게는 귀주성의 동서를, 김경손군에게는 성의 남쪽을 지 키게 하시고,도호부사(都護府使)가 이끄 는 별초군(別抄軍)과 위주와 태주의 수령 은 별초군 250여인을 3면으로 나누어 지 키게 하셨다. 그러자 몽고병은 여러 겹으 로 성을 에워싸고 서남북문쪽을 주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성 안에 있던 중군(中 軍)이 돌격해 나가면서 몽고병을 공격하 였다. 그때 몽고군은 위주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사로잡아 성안으로 들 여보내면서항복을권유하도록하였다. 그러나 박 서 장군은 이를 참수하고 저 항 하 시 니 몽 고 군 은 정 예 기 병 3 백 을 선 발 하여 북문을 공격해 왔다.박 서 장군이 이 를 격퇴하시자 몽고군은 누거(樓車)를 만 들고 큰 평상을 만들어 그 안에 소가죽을 씌워 병기를 숨겨 성 밑을 파고 침노하려 고 하였다.이에 박 서 장군이 성에 구멍을 뚫고 쇠물을 부어 누거를 불태우자 또한 땅이 꺼지면서 몽고병 30여명이 압사되었 다. 그리고 썩은 가시덤불을 불살라서 나 무 평상을 불태우시니 몽고병들은 놀래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몽고 병이 대포거 15대를 가지고 성의 남쪽을 심히 공격해 왔다. 박 서 장군 역시 성 위 에 대 를 쌓 고 포 를 쏘 아 돌 을 날 려 이 들 을 물리치셨다. 이번에는 다시 사람 기름을 나무에 부어 수북히 싸놓고 성을 화공하 니박 서 장군이 물을 뿌렸으나 불은 더욱 세 차 게 타 므 로 진 흙 을 파 서 물 에 개 어 던 지도록 했더니 불이 꺼졌다. 몽고군이 또 차에 풀을 싣고 와서 불을 질러 초루( 힌 樓)를 공격하니 박 서 장군은 미리 수루 (水樓)에 물을 저장했다가 그 물을 뿌려 불을 껐다. 이렇듯 몽고군은 한 달 동안이 나 성을 에워싸고 백방으로 공격했으나 박 서 장군은 번번이 임기응변으로 더욱 굳게방어를 하시니 몽고군도 할 수없이 퇴각했다. 그리고 다시 북쪽 접경지대의 여러 성병(城兵)들을 데리고 와 포거 30 대를 줄 세워놓고 성랑(城廊) 50간을 파 괴하였다. 그러나 박 서 장군은 파괴될 때 마다 다시 쌓아 올리고 철색으로 막으니 몽고군도 감히 다시 공격해오지 못하자 박 서 장 군 은 나 가 싸 워 이 를 격 퇴 하 고 대 승을 거두셨다. 몽고군이 다시 대포거로 공 격 해 오 매 박 서 장 군 역 시 포 거 로 돌 을 날려 무수히 격살했다. 몽고군은 퇴각해 서 나무돈대로 수비하면서 몽고 원수 철 예탑은 우리나라의 일에 밝은 회안공 정 (淮安公 )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귀주 에 이르러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통첩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 서 장군이 듣지 않자 또다시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해 왔다.박 서 장군은 이를 맞아 대우 포(大于砲)로 치자 부서지지 않는 게 없 었으니 운제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대우 포란큰칼이있는큰병기이다. 왕은 우간의대부 최임수(右諫議大夫 崔林壽)와 감찰어사민희(監察御使 閔曦) 를 보내어 몽고인을 이끌고 귀주성 밖으 로 가 서 회 유 하 기 를 “이 미 회 안 공 정 을 보 내어 몽고와 강화하고 우리나라 3군도 역 시 항복을 했으므로 전쟁을 파하고 나와 항복하는 게 가하노라”고 재삼재사 회유 하였으나 여전히 듣지 않는지라 감찰어사 민희가 걱정하고 울분하여 칼을 빼어 자 결 하 고 자 하 는 지 라 박 서 장 군 등 은 거 듭 왕명을 어기고 있다가 맨 내종에 항복하 였다. 후에 몽고의 사신이 박 서 장군에게 와서 끝내 성을 고수하면서 항복을 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죽이려 하자 최이(崔 怡)가 이르기를 “경의 우리나라에 대한 충절은 비할 데 없으나 몽고사신의 말도 역시 가히 두려우니 경은 헤아리기 바란 다”고 하였다. 이에 박 서 장군은 마침내 고향으로돌아가셨다. 몽고군이 귀주성을 포위했을 때 그 전 투 를 함 께 한 나 이 7 0 이 나 된 사 람 이 성 루 와 기 계 를 두 루 살 피 고 나 서 감 탄 하 며 말 하기를 “나는 머리를 올리고 성인이 되면 서부터 군대에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지 (城池)와 공격하는 전투 상황을 많이 봤 으나 이렇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내 항 복 하 지 않 은 것 을 일 찍 이 본 적 이 없 다 . 이 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장차 반드시 장 상(將相)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일 박서 장군은 과연 문하평장사(門下 平章事)를배명받으셨다. [송문주(宋文胄)가 쓴 명장전초(名將 傳抄)] *후일 박 서 장군은 귀주성에서의 혁혁 한 공훈과 진충보국하신 충절로 음성을 식읍으로 하사 받으시고 분적하시어 장군 을 중시조로 하는 음성박씨(陰城朴氏)가 되셨다. 2.송암휘문수공전(松菴諱門壽公傳) 공의 휘는 문수(門壽)요, 초휘는 문주 (文柱)이며, 스스로 호를 송암(松菴)이라 하고 죽산 박씨이다. 고려조의 첨의정승 문광공(文匡公) 호 행산(杏山) 휘 전지 (全之)의 손자이시다. 지정(至正--원나 라 순제<順帝>때의 연호)임오년(고려조 충혜왕<忠惠王>3년, 서기1342년)에 공은 유복자로 태어나시니 용모가 비범하시고 총명이 뛰어나시며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 시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시며 문장과 덕행이 세상의 모범이셨다. 여조의 말직 에 벼슬하시어 도평의사사 찬성사(都評 議使司贊成事)의 위계에까지 이르셨다. 공은 인군을 섬기고 직책을 봉직하는 데 는 충성을 다하시 고 정성을 다하셨으며 처세하고 행동하심에는 스스로 즐거워하 시고 어지셨으며 뜻을 높이시어 포은(圃 隱) 정 선생(*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말 함)과 더불어 도의가 서로 통하고 의기가 화합하셨다. 고려의 운세가 막 끝나려 하자 공은 문 생인 조정 선비들 70여명을 거느리시고 만수산 두문동(萬壽山 杜門洞)으로 피해 가시어 은거하시면서 문수(門壽)로 휘를 고치셨다. 이것은 만수산에 들어가시어 문을 막는 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는 것이 ‘언지록’ (言志錄)에 있다. 공은 스스로를 편안하 게 다스리며 세월을 보내시고 고사리를 꺾어 포은선생에게 보내시면서 수양산의 지조를 보이셨으며,또한 시를 지어 “시내 물 건너 버드나무는 잠을 자면서 도연명 (陶淵明)의 꿈을 꾸고, 산에 올라가면 고 사리가 백이의 마음을 토해 낸다”고 하셨 다고 한다. 이것은 가히 공의 뜻을 보여주 는것이라할수있다. 조선조의 태종조에서는 누차 좌의정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면서 공을 불렀으나 공은 끝내 응하지 아니 하시고 마침내 두 문동에서 졸하시니 이것은 2월 2일이었지 만 그 연도는 미상이다. 혹은 공이 고천우 (高天佑)와 변귀수(邊貴壽)등 17명과 더 불어 두류산(頭流山)으로 멀리 도망가 은 둔하셨다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믿을 수 가 없다. 대저 그 충절의 사적은 모두 ‘송 도지’(松都誌)나 ‘고려명신록’(高麗名臣 錄)및‘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등에 실 려있다.조선조순조신미년(순조11년,서 기1811년)에 이르러 특명으로 국왕이 송 도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하도록 명하 시고, 헌종 병신년(헌종2년, 서기1836년) 엔 경연장에서 대신들의 주청으로 공에게 충현공(忠顯公)의 시호를 증정하였는데, 그 시호의 교서장은 판서 김이양(金履陽) 공이 짓고 행장은 노주 오희상(老洲 吳熙 常) 선생이 지었다. 공의 7세손에 계성(繼 成)이 있고, 방손으로 신룡(信龍)과 성룡 (成龍)및 명룡(命龍)이 있으니 모두 충절 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본 전기 의집필연월일과집필자는기록이없음) 3.초곡휘계성공전(草谷諱繼成公傳) 공의 휘는 계성(繼成)이요 자는 이술 (而述)이며 호는 초곡(草谷)으로 곧 송암 (松菴)의 7세손이시다. 공은 어려서부터 전심전력을 기울여 성리학을 힘써 배우시 고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시며, 예로써 몸 을 다스리시고 의로써 처신하시며 부모님 을 효성으로 섬기셨다. 부모님이 돌아가 시자 3년간의 여묘생활로 슬픔으로 인해 건강이 너무나 훼손되시니 향리에서는 모 두 칭송이 자자하고 마침내 이름이 조정 에 알려지자 특별히 참봉을 제수하였다.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임진년(조선조 선조25년, 서기1592 년)에 왜구가 분란을 일으키자 공은 가세 를 기울여 병기를 주조하시어 막 서 울로 가시려고 적개심이 타오르실 때 부모님께 서 병환중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달려 돌아가시어 부모님을 구호하시고 아우님 이신 승성(承成)공으로 하여금 군량미와 함께 병기를 고득뢰(高得賚)의 의병소로 부송하시며 앉아서 그 절도와 전략을 지 휘하셨다. 공은 권률(權慄) 원수와는 인척지간의 세의가 있는지라 사생을 같이하기로 결의 를 맺었는데 행주대첩은 공의 전략 모의 가 많이 있었다는 장계가 조정에 알려져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제수했으나 공은 공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를 사양하시고 끝까지 그 명을 받들지 않으셨다. 정유년 (선조30년, 서기1897년)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고 구례를 경유해서 남원에 들어오 자 공께서는 의병을 일으켜 집안의 종복 들을 거느리고 향리에서 모병을 하여 3천 여명을 모으시고 군대의 함성을 울리면서 구례 석주 남원 산동 등지에서 연전 연승 하셨다. 그런데 적병이 운봉으로부터 승 기를 타고 포위하여 읍성(*남원 읍성을 말함)이 매우 위급해지자 부사 임현(任 鉉)은 공에게 밖에서의 원조를 청하였다. 공은 병사들을 이동시켜 밤티재(栗峙)에 이르러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적을 죽이고 붙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후원병은 이미 다 끊어졌고 쏠 화살도 역시 다 없었으나 공은 물러서지 아니 하시고 한 발작 앞으 로 나가시다가 탄환을 맞으시고 전사하시 니 때는 선조26년 계사년(서기1593년) 6 월 29일이었다. 공의 제씨인 승성공(承成 公) 역시 진주에서 순절하시니 그 월일은 미상이다. 그 실적은 해동충의록(海東忠 義錄)에 소상히 실려 있다. 정조 을묘년 (정조19년, 서기1795년)에 사당 건립의 논의가 있었으나 익종 임진년(순조32년, 서기1832년)에 이르러서야 권률 원수와 더불어 나주의 ‘충장사’(忠莊祠)에 배향 되셨다. (*본 전기의 집필 연월일과 집필 자는기록이없음) 4.진사휘춘영공전(進士諱春榮公傳) 공의 휘는 춘영(春榮)이요 자는 길초 (吉初)이며 진사이시다. 공은 중시조 충 정공 휘 기오(忠貞公諱奇悟)의 21세손이 시며 예종조 영의정 문헌공 휘 원형(文憲 公諱元亨)의 현손이요 증조고는 의정부 좌찬성 휘 안성(安性)이며 조고는 전부 (典簿) 휘 수강(守綱)이고 고는 감역(監 役) 휘 징(澄)으로 명종 4년(서기1549년) 기유생이시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시고 충효의 천성에 호매한 기상을 타고나셨으며 학문이 깊고 특히 문장을 잘하시어 이름이 높으셨다. 공은 젊어서 황해도 배천(白川)으로 이사를 가셨는데 기질 탓인지 학문보다는 오히려 무술에 취미가 깊으시어 낮에는 궁술과 마술을 익히시고 밤에는 병서를 읽으시며 무인과 같이무술을닦으셨다. 그러던 차 선조25년(서기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 불과 20여일 만에 한성이 무너지고 선조는 의주로 몽진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왜병의 공격과 분탕질로 어느 곳 하나 안전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판국 인데도 관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장정들을 마구 징발한 오합지중에 불과하 여 잘훈련되고 조총으로 장비된 왜병들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나허약하였다.이런 가 운데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방어하시던 진주성이나 권 률(權 慄) 장군이 수비하 시던 행주산성 등 몇 곳에서만 많은 왜병 을 무찔러 대승하고, 특히 남해 일대를 방 어하시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수군만이 연전연승으로 대첩을 거두었을 뿐, 우리나라 전 국토는 철저하게 유린되 었다. 이러한 판국이라 우리나라 도처에 서는 충성스러운 열혈 의병들이 벌떼처럼 봉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며 국토를 수호하 는 데 앞장섰다. 그 가운데에서도 고경명 (高敬命) 장군이나 중봉 조 헌(重峯 趙 憲)선생 같은 의병장들이 기세를 올려 왜 적을 크게 무찌르며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해 7월 21 일 공은 김덕성(金德誠) 조종남(趙宗男) 조정견(趙庭堅) 등과 더불어 금산촌(金 山村)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 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 부사 이정암(李 廷와)이 찾아와 백미를 내놓으면서의병 궐기를 성원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이들 은 각 기 집 으 로 돌 아 가 장 정 들 을 모 아 정 한 날자에 다시 합세하기로 하였는 바 공 은 돌아가서 장정들을 모으고 의룡(義龍) 과 경룡(景龍) 등 두 아드님과 집안의 노 복들을 모두 이끌고 모의한 사람들과 합 세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일 으켜 왜병들을 무찌르는 한편, 일부는 양 곡을 수집하였다. 공의 거병 소식을 들은 왜장 나가마사(長政)는 대군을 이끌고 공 의 의 병 대 를 추 격 해 왔 다 . 이 를 본 의 병 중 일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자가 있었 다. 이에 공은 분연히 일어나 말씀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중과부적으로 대적이 되지않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 므로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 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다. 그러나 나와더불어적과대적하여죽음으로써국 은에보답하고자하는자는용감히싸우다 함께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 바란다”고 외 치며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가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공을 따라 칼을 휘 두르고 적을 치며 나아갔다. 그러는 사이 날이저물어어둠이깔렸는데도싸움은계 속되었는데왜군은닥치는대로조총을난 사하고검을휘두르며우리의병들을공격 하니의병들은그자리에서전별당하고말 았다. 아아 장하고 원통하도다. 공과 의룡 경룡 3부자는 한곳에서 함께 순국하시니 그 높 은 기 개 와 충 절 을 어 찌 감 개 하 지 않 을 수 있겠는가?뒤늦게 부군과 두 아드님 들의 비보를 접하신 배위 진주소씨(晉州 蘇氏)는 공과 두 아드님들의 유해를 수습 하여 수원화방리(禾方里) 본향으로 운구 하여선산에장례를모셨다. 공은 의룡(義龍) 서룡(瑞龍) 경룡(景 龍) 운룡(雲龍) 신룡(信龍) 등 모두 다섯 아드님들을 두셨는데 끝 아드님이신 신룡 공은 정묘호란(인조5년, 서기1627년) 때 에 의주에서 순절하셨으나 시신을 찾지 못해 유의각(遺衣閣)을 마련하고 추모하 는 바로 그 주인공이시다. 그라하여 공과 의룡 경룡 신룡 등 4부자분들이 모두 나라 를 위해 순국하여 충절을 다하신 것은 고 금에 드문 예이니 아아 하늘도 감탄하는 만고충문의귀감이아니겠는가? /을미년(서기2015년) 6월후손 형규는 이두희(李斗熙) 공이 닦은 공의 행장을 삼가간추려다시적다. <다음호에는 ‘이택 박신룡, 부사 박성 룡, 우후 박명룡 傳 과 부 록 효 열 편 의 효열부’가 게재됩니 다.> ※‘죽산박씨칠충 열’이 필요한 성손 여러분은 본보에 연 락주시면 받아보실 수있습니다. 죽산박씨칠충렬(七忠烈) 傳 선조유지를 찾아븣 박서장군이배향된용강서원전경.경기도일산동구성석동. 용강서원제향광경(매 년음3월16일과9월16일春秋享祀) 송암공박문수선생부조묘.전북남원시수지면호곡리 송암공부조묘향사광 경(음2.2) 충렬사 - 전북 남원시 향교동 636번지. 초곡공(휘 계성)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에 남원지역에 서순절한선현들을배향하고있다.(뒤편에만인의총이있음) 박한수 CMYK